누구든지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자를 사위로 삼으리라

″아바마마! 무슨 근심이 있으시옵니까?″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공주가 말했다.

왕은 밤하늘을 우러러 보며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공주! 이번 싸움에서 우리 장수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며칠만 계속된다면.... 아니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공주는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소녀도 짐작은 하였사옵니다. 아바마마, 그일 때문이시라면 소녀에게 한가지 계교가 있사옵니다.″

왕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공주는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아바마마 적장의 목을 베어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녀는 서슴지 않고 그 분에게 시집을 가겠나이다.″

″공주 기특한지고! 공주는 벌써 어른이 다 되었구나.″″황공하옵니다″왕은 그 다음 영을 내렸다. ″공주의 간청에 의해 누구든지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자를 사위로 삼으리라.″

대신들이 놀라서 반문했다.″상감마마! 공주님의 부군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간택하시다니요?. ″짐의 명령대로 전하기나 하시오.″

이때 갑자기 궁궐 뒤뜰에서 우렁찬 말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잇따라서 궁궐 밖으로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괴이한지고! 어떤 말이 저렇게 울부짖으며 달려가는가?″그러나 그 까닭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덧 새벽이 닥쳐왔다. 뜻밖에도 승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공주를 데리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군사들은 사기 충천하여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왕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공주의 손을 움켜잡고 성벽을 내려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궁궐 뒤뜰엔 그 말의 울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왕은 황급히 뒤뜰로 나가 보았다. 뜻밖에도 말은 적장의 목을 물고 있었다. 옆에 섰던 한 군사가 얼른 부복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왕마마! 이 말이 신기하게도 적장의 목을 베어 왔사옵니다. 그로 인해 적군은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었으며, 아군의 승리는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제야 말도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오오! 기특한지고, 마공이여! 그대의 공로로 이 나라가 승리하였도다.″

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후로 왕은 말을 극진히 대우하여 왕마로 삼았다.

그러나 이 말로 인해 궁궐에서는 또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곧 사위로 삼겠다는 왕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바마마! 소녀는 이 나라를 구해준 말을 남편처럼 섬기며 살겠나이다.″그러나 왕은 적장의 목을 베어 온 것이 사람이 아닌 짐승이므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치않은 소리, 말은 궁궐에서 극진히 대우하고 있으니 공주는 그 일을 잊도록 해라.″그러나 공주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왕은 매우 난처해 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일생동안 쓸쓸하게 지내게 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드디어 왕은 한 꾀를 생각해 내었다.

″여봐라! 저 말의 목을 당장 베도록 하여라!″

공주가 울부짖으며 부왕에게 매달리는 순간 뒤뜰에서는 말의 비명 어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떨어지는 순간의 처절한 포효였다.

그 후 왕은 본의 아니게 죽인 말을 못내 아깝게 생각하여 그 가죽이나마 간직하려고 뒤뜰의 나무 위에 걸어서 말리게 했다.

공주는 매일같이 통곡을 하면서 하루에 두 번씩 말의 가죽을 매만지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뒤뜰에 갑자기 공주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궁궐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뒤뜰로 달려가 보았다.

그런데 이 또한 무슨 변괴이랴! 갑자기 돌풍이 일더니 말가죽이 날으며 공주의 몸을 가죽 속에 싸가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날부터 왕은 상심한 나머지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듬해 봄이 돌아왔다.

"공주를 싸가지고 날아간 말가죽이 시골에 있는 어느 나무 위에 걸렸더라" 는 전갈이 들려왔다.

왕은 곧 그곳으로 가 보았다. 과연 말가죽은 거의 썩은 채 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이 말가죽처럼 공주의 몸도 썩은 것일까? 왕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여봐라! 말가죽을 벗겨보아라!"

말가죽을 벗겨본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말가죽 속엔 이상한 벌레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 신하가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이 벌레들은 공주 마마의 화신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오오, 공주의 화신이라고? 불쌍한 공주여!"

그후 왕은 말가죽에 싸였던 벌레를 잘 키우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왕도 틈 나는 대로 그 벌레를 보기 위하여 시골로 가곤 했다.

백성들은 이 희고 부드러운 벌레를 징그럽게 여기지 않고 잘 키워 몇 년 후에는 나라안 방방곡곡에 이 벌레가 퍼지게 되었다.

그 벌레가 바로 누에이며 그 말가죽이 걸렸던 나무가 바로 뽕나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누에가 실을 뽑아 내어 고치를 짓는 것은 공주의 뛰어난 자수솜씨를 본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누에를 산채로 먹으면 공주처럼 아름다워 진다는 전설이 지금도 그 지방에서는 아낙네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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