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가 약탈한 곡식을 사량도 등 가난한 섬주민에게 돌려줘

통영시 사량면 사량본도에서 서쪽으로 3km에 있는 수우도. 때는 이조중엽쯤, 슬하에 자식이 없어 걱정하며 살아가는 한 가난한 어부가 있었다. 

부인은 매일 뒷산에 올라가 정안수를 떠놓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정성들인 기도를 하여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두 내외는 기쁨에 넘쳤다.

이 무렵 합천 해인사의 고승이 천문을 보고 있자니 남해바다에 장군별이 비치는 것이었다. 이는 남해바다 어느곳에 위인이 탄생될 길조였으므로 대사는 그 장소를 찾기 위해 삼천포, 남해, 통영 등을 두루 살피다가 바로 통영시의 수우도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쌀한말과 미역을 미리 준비해간 대사는 수우도에 가서 곧 순산할 부인이 있는가를 알아보니 어떤 부인이 임신 12개월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나오고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사는 기쁜 마음으로 그 집을 찾아가 하늘을 쳐다보니 과연 장성이 그곳을 향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별을 보고 점을 쳐보니 어느 시간까지 태어나면 국가에 충성하는 휼륭한 인물이 되겠고 그 뒤에 탄생할 때는 국가의 역적이 될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는 역적이 될 시간에 태어났다.

대사는 안타까워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태어난 아이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늑골에 구멍이 뚫려 있어 고기아가미와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7세가 되자 바다에서 고기와 같이 헤엄치며 놀았다.

20세가 되자 바다의 의적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설익장군이라 불렀다.

당시 남해안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 전라도 곡창지대의 쌀등 곡식을 약탈해가는 일이 허다했다. 설익장군은 수우도의 제일 높은 산정에 올라가 곡식을 싣고가는 배를 향해 부채를 쳐서 배가 끌려오게 하고는 배안에 있는 곡식을 풀어놓은 뒤에야 다시 부채질을 하여 배를 돌려보내 주었다.

장군은 이 곡식을 사량도, 수우도 및 근방의 가난한 섬주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섬사람들은 설익장군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한편 일본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조정에서도 설익장군을 잡으려고 했으나, 설익장군이 물 속에서 열흘이나 보름 동안 지내기도 하고 수우도, 욕지도, 두미도, 사량도 등 여러 섬을 번개같이 다니고 있었으니 좀처럼 잡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몇년 동안의 끈질긴 추적끝에 드디어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설익장군은 사후에도 얼마나 위력이 컸던지 어부들이 고기잡이 가서 맨먼저 낚은 큰 고기를 제각 앞 정자나무에 걸어두면 뼈만 앙상히 남았다고 한다.

제사를 잘 모시면 고기잡이도 잘되고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했다 한다.

 6.25동란 이후 한 순경이 기피자를 찾기 위해 수우도에 왔다가 제각앞 정자나무 가지를 하나 꺾었더니 섬을 출발한지 얼마 못가 배가 고장나서 표류하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수우도로 다시 돌아와 술과 안주로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서야 무사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설익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당을 짓고 거기에 장군의 초상을 그려두고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설익장군 모친의 묘가 수우도에 남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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