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서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명확한 원인은 알기 힘들지만 백정의 신분으로 겪는 차별과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동하던 무대가 되었던 명종 대에는 명종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그 동생인 윤원형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워지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민생이 어려워졌던 시기였다.

임꺽정은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 틈을 타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평분자들을 선동하여 황해도 및 함경도를 중심으로 각지의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종횡무진하였다.

이때 그 악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임꺽정이 한 고을에 나타났다 하면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길을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교통이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흔히 을묘왜변 당시에 군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정 신분 때문에 차별당한 것이 도적일을 하게 된 주원인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후 1559년부터는 제법 세력이 커져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살해하고 그 재물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본격적인 의적 행위를 벌였다.

덕분에 백성들과 아전들이 임꺽정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임꺽정의 무리들과 내응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들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며, 관아에서 병력을 내보내면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들마저도 죽임을 당하였다.

제법 큰 세력에다가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게 된 임꺽정 패거리는 점차 대담해져서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여 조선 전역을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곧 세력 범위를 넓혀 개성에 나타나는가 하면 1560년에 서울에까지 출몰하였다.
 임꺽정과 그 도적떼는 더이상 일개 도적떼가 아닌 반체제적 세력으로 간주되었으며, 조정에서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보내 평산에 집결한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꺽정은 되려 관군을 무찌르고 군관을 살해하였으며 군마를 약탈해갔다.

결국은 임금인 명종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의 5도에 대장을 정하여 임꺽정을 잡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관청에 명을 내려 임꺽정을 잡는데에 주력하라고 명할 정도로 임꺽정의 악명은 자자했다.

그러나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조정의 독촉을 받던 장수들과 포상을 노리던 고을 수령들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임꺽정과 한패라 하여 벌주고 고문하다가 사람 잡는 일도 여럿 있었다.

이런 난리통 중에 1560년 12월, 임꺽정의 참모였던 도적 서림이 붙잡혔다. 임꺽정과 도적떼의 사정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었던 서림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임꺽정을 추격하였고 차츰 도적떼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1562년에 임꺽정은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의 토벌군들에게 포위당한다.

 탈출할 길이 없어지자 임꺽정은 토벌군 복색으로 변장한 후 꾀병을 부리면서 은근슬쩍 뒤로 빠질려고 했는데 토벌군 병졸들이 이를 수상히 여겼고 때마침 서림이 임꺽정을 알아보고 토벌군에게 알리는 바람에 들켜 급히 도주하였고 추격하는 토벌대가 화살을 난사하였다.

임꺽정은 결국 여러대의 화살에 맞은 후 "내가 이렇게 된건 모두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니가 어찌 관군에 투항할 수 있느냐?" 라고 서림을 질책한 후 사망하였다는 이 내용은 실록에는 없다.

임꺽정이 사로잡힌후 15일 후에 참형에 처해졌다고 하지만 정작 실록 등 당시 기록에는 임꺽정이 처형당했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다. 
다만 기재잡기에 위에 서술된 것처럼 임꺽정이 사살되었다는 내용이 존재하고 실록에는 임꺽정이 이미 생포중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임꺽정은 관군과의 대치중에 전사한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