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절경의 절반 이상이 白島에 있기 때문에 "꼭 가야한다"

 '역사의 섬' 거문도에는 명망 있는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귤은(橘隱) 김류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

1814년(순조 14)에 태어난 김류(金瀏)[1814~1884]는 과거를 보려고 한양으로 가던 도중 전라도 장성 땅에서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학문에 감화되어 과거를 포기하고 문하생이 되었다.

 노사의 학문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류는 고향에 낙영제를 세우고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말년에는 완도의 청산과 신지도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884년(고종 20)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류가 남긴 '해상기문'에는 당시 세계의 열강이 앞 다투며 찾아오던 거문도에서 외국인들과 나누었던 필담에 관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김류의 호인 귤은은 김류가 태어나고 살았던 귤정리에 은거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촌마을의 남쪽에 자리한 죽촌은 이름에 나타나듯이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자연이 준 가장 큰 선물인 뛰어난 풍경을 간직한 거문도는 고대로부터 중요한 해상교역로이면서 섬 주변이 풍족한 어장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이 머물기 시작했고, 그 삶의 흔적들은 역사와 함께 전설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섬 주변에 많은 사연을 가진 동굴, 바위, 해변 등과 사람 이름의 지명들은 이를 바로 말해주는 것으로 솔순이 빠진굴, 멍실여, 용냉이, 신선바위, 아차바위, 신지께, 고두리와 오도리 영감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귤은 김류가 쓴 '삼호팔경(三湖八景)'은 삼산면 지역의 거문도 세 섬 사이 호수 같은 바다 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하고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귤정(유촌리)에 비치는 가을 달빛/ 준촌의 밤 대나무 숲에 밤비 내리는 소리/ 서도 녹싸이(산) 끝의 수십 길 절벽 아래 바람 부는 날의 성난 파도/ 용냉이 용물통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해넘이/ 배골[서도리 남동쪽 해안]의 하얀 모래와 어우러진 삼호의 경치/ 불배를 이용하여 고기를 잡는 거문도 내해 밤바다 고기잡이/ 안개 낀 기와집 몰랑과 신선 바위 부근의 풍경/ 백도에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돛단배.(橘亭秋月 竹林夜雨 鹿門怒潮 龍巒落照 梨谷明沙 紅國漁化 石凜歸雲 白島歸帆)

거문도까지 가서 백도를 보지 못했다면 안 간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문도 절경의 절반 이상이 백도에 있기 때문이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km쯤 떨어진 백도(白島)는 망망한 바다 위에 점점이 뿌려진 39개의 크고 작은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무인 군도이다. 백도는 다시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뉘는데 상백도 수리섬에 있는 무인 등대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백도의 중심 역할을 한다.

섬 전체의 봉우리가 백(百)개에서 하나가 모자라 ‘백도(白島)’라고하고 또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흰 빛을 띠고 있어 ‘백도’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의 아들이 못된 짓을 하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받아 이 세상으로 내려왔지만, 용왕님의 딸에게 반해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흐른 뒤 옥황상제가 아들이 그리워 신하들을 보내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으나 신하들 마저 돌아오지 않자 아들과 신하들을 벌주어 돌로 변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크고 작은 섬인 백도가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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