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을 神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신성성을 견지하면서 전승

최영은 무장으로서 수많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간신의 발호를 징치한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최영장군의 실제 행적과는 다른 설화가 세간에 전승되는데 경기도 강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에서 채록된 것이 있다. 강화도 자료는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녀 송분임이 구연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영장군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최영장군은 사윗감은 자신이 직접 시험하여 자기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젊은이를 불러서 먼저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즉, 최영장군이 목을 자르고 난 뒤 그 목이 다시 붙어 소생하는 재능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목에 매운 재를 뿌려 아버지의 목이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대적 퇴치설화에서 전이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영장군의 신이한 능력을 강조하는 의미와 억울한 최후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자료에 의하면 경상도 덕구리에는 서낭당 당신으로 최영장군을 모시고 있고 영월군 내덕리에는 단종신을 서낭신으로 모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두 마을의 서낭기가 마주치면 최영장군 모신 깃봉이 저절로 부러진다는데 그 이유는 신하보다 왕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개성 덕물산 무당의 신당에도 최영장군이 신으로 모셔졌는데 이 신에게는 처녀를 바치는 습속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최영장군 설화는 대체로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 주변에서 신성성을 견지하면서 전승되고 있다.

고려 충숙왕 3년(1316)에 철원(개성 혹은 충남 서산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출생하여 73세의 일기로 개성에서 참수(斬首)된 최영(崔瑩, 1316~1388)은 무속에서 장군신으로 섬기는 실제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이다.

최영은 문하시중으로 있던 고려 우왕 14년(1388)에 명나라 땅 요동(遼東, 현재의 랴오둥 반도. 압록강 선양 일대를 말함) 정벌 때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좌군과 우군도통사에 각각 조민수(曹敏修, ?~1390),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두고 3월에 개성을 출발해 평양에 도착한다. 평양에서 최영은 왕의 만류로 출정하지 못하고 왕과 함께 개성으로 돌아오는 대신 조민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으로 출정케 한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요동 진군을 포기하고 5월에 개경으로 역진격한다. 최영은 6월에 남은 군사로 대적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한다. 곧바로 체포되어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을 가서 같은 달 합포로 갔다가 7월에 충주, 다시 12월에 개경으로 옮겨져 참수된다.

고려의 충신으로 큰 공로를 이룩했으나 직속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참수까지 당하게 되는 억울한 생이 부각되어 한국의 무속에서는 그를 장군신으로 좌정시킨다. 최영 장군은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 및 남이(南怡, 1441~1468)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가장 열렬히 숭앙되고 있다.

무속적 세계관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세계에 안착하지 못하고 구중을 떠도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속은 이들 영혼을 달래고 천도하는 굿을 통해 해결한다. 그중 억울하게 죽은 왕이나 장군 및 유명한 공인 등은 무속의 신적 세계관에서 신격으로 추대되고 숭상의 대상이 된다.

최영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관련 사당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관련 유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 강원도 철원군과 홍성군의 최영 장군 생가, 홍성문화제의 최영 장군 영신제,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기슭의 최영장군묘, 경남 통영시의 최영장군사당, 제주도 추자면의 최영장군사당,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武愍祠), 부산 동구의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경남 남해시 미조면의 최영장군사당 무민사, 충북 충주시의 기봉영당,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최영장군당 등이다.

유적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최영 장군 신격의 숭상은 특히 중부 지역이 강세를 보인다. 최영이 탄생하고 입적한 곳이 중부 지역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관 분포를 볼 때 중부 지역이 강세로 나타난다.

개성의 덕물산에 있는 최영장군사는 조선조 초에 이루어진 최영의 신원회복으로 창건되고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민(武愍)’은 그때 받은 시호이다.

최영의 신격 숭상 영향은 한양과 주변의 경기 지역에 두루 미쳐 최영장군신의 보편화를 가속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은 개성 소재지인 황해도 지역의 무속에도 해당된다. 

오늘날 최영장군굿을 주도하는 최영장군당굿보존회가 경기도 고양시에 있고, 그 주무(主巫)가 황해도 만신(萬神)인 점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개성 덕물산의 도당굿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誌)』에 덕물산과 최영장군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젊은 처녀가 사당을 시봉(侍奉)하였고, 밤이면 신령과 접신하여 혼인을 맺고 있다고 적고 있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도 덕물산 도당굿의 웅장함을 잘 소개하고 있다.

개성의 도당굿과 최영장군당굿의 제차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개성의 도당굿 : [첫째날] 유가(당맞이와 유사), 부정풀이, 가망거리, [둘째날] 제석거리, 별상거리, 본향신거리, 도당할아비할망거리, 창부거리, 본향병졸거리, [셋째날] 군웅거리, 막동거리(활쏘기), 뒷전/영산 등 총 열두 거리.

최영장군당굿 : 신청울림, 당맞이, 일월맞이, 상산맞이, 초부정거리, 감흥거리, 소대감거리, 성주거리, 칠성/제석거리, 별상거리, 영정거리, 말명거리, 군웅거리, 타살거리, 대감거리, 먼산장군거리, 토일성수거리, 신장거리, 최영장군거리, 대신거리, 창부거리, 조상거리, 목신서낭거리, 마당거리 등 총 스물네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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