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다가 용왕의 말대로 海印寺를 창건

가야산 깊숙한 골에 늙은 내외가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은 두 늙은 부부는 산속에서 나는 갖가지 나무열매를 따 먹으며 조그만 화전을 이루어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갔다.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터라 내외는 낮이면 산새들을 벗으로 삼았고, 밤이면 하늘의 별들을 이웃으로 삼아가면서 쓸쓸함을 메꾸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이 늙은 내외에게 좋은 벗이 하나 생기게 되었다.

내외는 이날도 아침을 먹고 도토리나 딸까하여 집을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복실복실한 강아지 한 마리가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내외는 좀 이상했으나 하도 귀엽게 생긴 강아지라서 붙들어 들여 밥을 주며 키우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랐고, 늙은 내외의 정은 이 강아지에게 쏠렸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한 지도 삼년, 이젠 강아지가 아니라 커다란 개로 성장했으며 내외도 이 개를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래서 이들 세 식구는 아주 단란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또 한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할아버지는 지게를 챙겨 나무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누룽지를 바가지에 들고 개에게 먹일 참이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개는 누룽지에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다.

"저는 동해 용왕의 딸이온데 조그만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오게 되었는데, 다행히 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은혜로 삼년을 잘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속죄의 삼년이 끝났으니 다시 용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사온데, 두 분의 은혜가 태산같이 크온지라 수양부모님을 삼고 갈까합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개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거니와 더구나 동해 용왕의 딸이라니 두 내외는 놀랍고 한편 기쁘기도 하였다.

"제가 이제 곧 용궁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용왕님께 수양부모님들의 말씀을 드리고 그 은혜를 아뢰이면 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열두사자를 보내어 수양부모님을 모셔오게 할 것입니다. 

그때 열두사자가 오거든 무서워 마시고 꼭 따라 용궁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버님은 극진한 대접으로 맞을 것이고 저도 만나 보실 수가 있습니다. 

용궁에 오셔서 오래도록 노시다가 집에 오신다면 아버지께서는 용궁선사로 모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하나 가져가라 하실 것입니다.

저를 키워주신 보답으로 선물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거든 다른 것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다 싫다 하시고, 용왕이 앉은 자리에 놓여 있는 해인(海印)이란 도장을 달래서 가지고 오십시오.

 "용왕께서 노인을 모셔오라 해서 왔습니다. 시간이 바쁘오니 어서 가시죠." 할아버지는 들은 말이 있는지라 할머니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일러놓고 주저 없이 사자들을 따라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먼길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미천한 딸년을 삼년 씩이나 데리고 계셨다니 그 고마운 말씀 이루 다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용왕은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용상 넓은 자리에 노인과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좌우의 시녀들을 명하여 노래와 춤을 추게 하고 풍악을 울리게 하여 노인을 위로하고 이어서 음식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용궁의 어여쁜 공주도 수양 아버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금강보석의 수저로 입에 넣어 주며 수양어머니의 문안을 여쭈고 가야산에서의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젠 한달여일이나 잘 먹고 지냈으니 집에 돌아갈까 합니다." 그러나 용왕은 이왕 먼길, 오기도 어려우니 조금만 더 쉬다 가라고 간곡히 붙잡는다. 하지만 노인은 두고 온 노파 생각이 나서 더 이상 묵을 수가 없었다.

"말씀은 고마우나 아내의 소식이 궁금하여 내일 떠나야 겠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용궁의 보물이나 구경하고 가시오. 보시다가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용왕의 이 말에 노인은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공주가 해인을 가져가라고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용왕이 보고(寶庫)의 이 문 저 문을 열어 노인에게 보이니 수만 가지 탐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순금의 왕관, 금강석으로 된 화로, 옥가마, 산호초의 피리, 은구슬을 꼬아 만든 말, 실로 인간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진귀한 것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용왕이 보기에 노인은 이상했다. 그 찬란한 보석들을 구경만 하고 달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그 많은 보석들을 전부 구경하고 돌아설 찰나였다. 노인은 까만 쇠조각처럼 생긴 해인(海印)을 가리켰다.

"보배를 주신다니 저기 저것이나 가지고 가지요. 미천한 사람이 눈부신 보화를 갖게 되면 수명이 짧아진다니 저것이나 기념으로 가져갈까 합니다."

노인은 슬며시 용왕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용왕의 안색은 금새 새파랗게 질렸다. 확실히 귀중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용왕도 어쩔 도리는 없었다. 이왕 약속을 한 것이니 노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 그것 참, 이것은 용궁의 옥쇄인데, 참말로 귀중한 것이외다. 그러나 기왕 무엇이든 드린다고 약속했으니 가지고 가십시오. 갖다가 후일 이것을 잘 보관하여 지상에 절을 세우면 많은 중생을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용왕은 해인을 집어서 황금 보자기에 소중스레 싼 다음 노인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튿날 노인은 용궁을 떠나왔다. 용왕 부부는 구중(九重)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했고, 공주는 사자들이 멘 옥가마까지 노인을 따라와 눈물흘리며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수양 아버님 부디 안녕히 가세요. 용궁과 인간세계는 서로 다른지라 이제는 다시 만나 뵈올 수가 없겠사와요. 부디 해인을 잘 간직하시어 필요한 때 세번 치고 무엇 무엇 나오라 하십시오. 저를 길러주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그것으로 보답되었으면…." 채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공주는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노인도 이별의 아쉬움을 이기지 못한 채 열두사자의 옥가마에 올랐다. 가마는 순식간에 가야산에 당도하여 노인 내외는 다시 만났다. 노인은 아내에게 용궁의 얘기를 자세히 말해 주고 일변 해인을 두들겨 "내가 먹던 용궁의 음식이 나오너라." 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이냐. 산해진미가 가득한 주안상과 밥상이 방안에 가득히 놓이지 않는가. 내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는 무엇이나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해인들 똑똑 세 번을 치고 "금 나오너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오너라." 하면 은이 나오고, "돈 나오너라." 하면 돈이 나왔다.

두 노인은 해인을 가지고 오래오래 살다가 죽을 나이가 되어 용왕의 말대로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절이 바로 지금을 팔만 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海印寺)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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