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북부의 단단한 신앙공동체…"들판마다 밀레 '만종' 풍경"

한국인 1·2호 사제 김대건·최양업, '내포의 사도' 이존창 등 배출

"밀레의 유명한 그림 '만종'이 바로 여기 얘기유. 옛날부터 논밭에서 일하다가도 성당의 종이 울리면 삽과 호미를 던져두고 그 자리에 서서 삼종기도를 올렸대유."

주민의 95%가 천주교 신자인 당진의 합덕성당 김성태(41) 주임신부가 할아버지, 할머니 신자들에게서 종종 전해듣는 생생한 경험담이다. 성당 관할 지역에는 순교자가 없는 마을이 없다.

합덕성당은 내포 지역의 첫 성당이자 충청도 천주교회의 모본당이다. 이 시골성당 한 곳에서 배출된 신부와 수녀만 100명이 넘는다.

아산의 공세리성당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들이 보급해 나중에는 서민 가정의 상비약이 된 '이명래고약'을 만들어 나눠주던 곳이다.

김성태 신부는 23일 현지를 찾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신자 비율이 거의 백퍼센트였시유. 비신자들도 '배뚜리 바뚜리가 언제여?'라면서 성 베드로와 바오로의 축일(6월29일)을 물었대니께유. 가뭄이 들었을 땐 6월말까지는 비가 좀 와야 간신히 먹고 살 만큼 농사가 됐지유."

이 지역의 가톨릭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는 8월 한국에 오는 교황 프란치스코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석차 천주교 성지인 솔뫼와 해미를 찾는다. 이곳을 비롯해 당진, 서산, 예산, 보령 등 충남 서북부 지방은 예부터 내포(內浦)라 불렸다.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내포라는 지명은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지역이란 뜻이다.

내포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예부터 바닷길로 사람과 문물이 들고 나는 창구였다. 고려 말에는 성리학 수용을 주도했고,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가 많이 나왔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합덕성당부터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생가터인 솔뫼 성지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쯤 걸리는 순례길이다. 산간벽지까지 없는 곳이 없는 개신교 교회도 이 길에는 하나밖에 없다.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 신부 생가는 현장에서 발굴된 기왓조각 등을 토대로 고증을 거쳐 2004년 복원됐다.

소나무 언덕이란 뜻의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상, 기념성당과 기념관, 솔뫼 아레나 등으로 돼 있다.

기념성당과 기념관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형상화했다. 침몰 위험을 안고 떠난 일엽편주가 폭풍우에 돛이 찢기고 키가 부러졌지만 무사히 돌아왔듯이 한국천주교도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성장했음을 뜻한다. 라파엘호는 원래 바다가 아니라 강에서 운행하도록 만들어진 작은 돛단배였다.

원형극장 한가운데 모래를 깔아놓은 고대 로마의 경기장 아레나(Arena)를 본뜬 광장은 김대건 신부와 동료들이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상징한다.

1836년 열다섯 살 소년 김대건은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반년을 걸어서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845년 귀국해 선교활동을 하다 이듬해 9월 효수형에 처해졌다. 사제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하고도 한 달밖에 안 됐을 때 일이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솔뫼 성지 이용호(47) 신부는 "라틴어와 불어, 영어, 중국어까지 5개국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는 조선의 계급사회에서 모든 이의 평등을 꿈꾼 자유사상가이자 아시아의 화폐 개혁까지 생각했던 선진유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솔뫼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후손인 김해 김씨 성인공파 자손들이 그의 축일인 매년 7월 5일 미사를 올린다. 8월 15일에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곳에서 아시아청년대회 참가자 6천여 명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한국인 1, 2호 사제인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집안에 복음을 전한 이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2∼1801)이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외외가(外外家) 6촌간이다.

이존창의 생가터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예산의 여사울에 있다. 서학을 일찍 접한 여사울은 서학이 학문 차원을 넘어 신앙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의 못자리' 노릇을 했다.

이존창은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상경해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다. 1786년 세례를 받고 사제 대신 미사와 성사를 맡는 평신도인 가성직(假聖職) 신부로 임명됐다. 이후 고향에 내려와 김대건의 종조부 김종현, 조부 김택현을 비롯해 여사울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붙잡혔다 풀려난 뒤 1795년 다시 체포돼 1801년 정약용의 형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됐다.

이존창의 탁월한 교리 지도법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을 품었던 주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천주교 공동체의 씨를 말리려던 관아에서조차 그를 두고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고 한다.

"이존창이 어떻게 훈련을 시켜 놓았는지 내포의 천주교는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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