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연구 권위자인 박석무(72)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2003년 다산의 일대기 격인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출간한 바 있다.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기행문 형식을 빌려 다산의 인생을 생생하게 복원하려 한 저서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사상과 철학, 그에 대한 평가 등까지 다 담지 못했다는 점에서 늘 마음 한켠이 아쉬웠다고 한다.

당시 책 서문에서도 그런 소감을 밝힌 박 이사장은 최근 '다산 정약용 평전'(민음사)을 펴냄으로써 10년 묵은 숙원을 풀었다. '평전'의 사전적 정의는 '개인의 일생에 대해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다.

22일 서울 중구 순화동 다산연구소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애초 다산을 연구하려 한 목적이 그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알려 사회를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며 "이 책으로 그 임무에 흙 한 삽 떠 얹은 셈"이라고 말했다.

평전이라는 형식답게 책은 다산의 일대기를 훑어가는 와중에 그의 인간적 됨됨이와 사상, 업적에 관한 다양한 평가를 담았다. 저자 자신의 평가도 있지만, 당대 또는 '한문을 일상적으로 쓰던' 시기까지 인물들의 평이 대부분이다.

"다산 저서가 원체 많고 다 한문입니다. 일단 한문으로 된 저서를 다 읽고 이해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죠.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한참 지난 후대보다는 한문을 사용하던 시대 사람들의 평가가 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해 구할 수 있는 글은 모조리 수집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다산 평론가'들은 조선의 대표적 '학자 임금'이던 정조부터 다산의 직계 후손, 추사 김정희,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 위당 정인보, 구한말 우국지사 매천 황현 등에까지 이른다.

다산의 사상을 유물사관으로만 평가했다는 비판이 있긴 하나 최익한을 비롯해 일찍부터 다산 연구에 몰두한 북한 학자들의 성과도 거론된다.

물론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 이 책에서 다산에 대한 평가는 '찬양' 성격이 강하다. 박 이사장은 서문에서 "당대의 평가이건 멋 뒷날의 평가이건, 대체로 다산의 사람됨과 학문에 대해서는 칭찬이 주를 이루고 잘못됐다거나 좋지 않다는 평가는 많지 않았다"며 "찬양 위주 평전이 된 것은 필자의 역량 부족"이라고 털어놨다.

그렇다고 해서 다산이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대의 관점이라는 전제 아래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

"다산은 한글을 '언문'으로 낮춰 부르던 조선시대에 '국문'이란 말을 쓸 정도였으면서도 정작 그가 남긴 한글 작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편지를 썼으면서 딸에게 보낸 편지는 보이지 않고요. 자신이 추구한 변혁과 개혁의 주체를 '현명한 군주'에 한정한 것도 지금 기준으로는 한계라면 한계죠. 다산은 '혁명적 행동가'라기보다 '진보적 학자' 정도로 봐야 합니다."

책에는 박 이사장이 대학에서 다산 사상을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토론한 결과물도 반영됐다. 예를 들면 '신유사옥(辛酉邪獄) 당시 목숨을 위협받은 다산이 천주교도들을 고발한 행동은 비겁하지 않았나'를 두고 강의실에서 벌어진 토론이다.

"한 학생이 이런 의견을 내놓더라고요. '다산은 진짜 천주교도였던 형 정약종과 달리 전제군주 체제나 유교적 사회 풍속을 부정하는 천주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됐다고 여기는 일에 가담한 이들을 고발한 것을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요.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 깨달은 내용은 책에도 반영했습니다."

책에도 언급됐지만, 다산은 문과 급제 후 '둔하고 졸렬해 임무 수행 어렵겠지만 /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 원하옵니다'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 등장한 '공렴'(公廉) 정신이 다산 철학의 핵심이라고 박 이사장은 강조했다.

"세월호 참사도 책임지는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공렴 정신이 없어서 터진 겁니다. 사사로운 태도를 보이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하면서 청렴하게 사는 게 공렴입니다. 다산은 그 사상을 몸소 삶으로 구현한 인물이죠. 공렴 정신 없이는 이런 참사가 언제든 또 일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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