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시가 쉽다​    
 -오늘 나는 나를 쓴다

                                      김숙영

사랑보다 시가 더 쉽다
시는 절대 질투를 하지 않고 달아나지 않는다
당신의 뒷모습은 비겁하지만
시는 끝없이 거룩하다
내가 원할 때 당신은 없다
그러나 시는 기척으로 떠돈다
생각해보니 당신은 나를 차단했고
시는 나를 한 번도 밀어내지 않았다
당신은 매번 쓸모없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럴 때 당신의 어깨는 가까운 국경이지만
시의 어깨는 항상 옆이다
경계 없는 옆구리다
당신은 일방통행이지만 시는 쌍방통행
당신은 뒤늦게 나를 아는 척을 한다
시는 진짜 처음부터 나를
억척스럽게 껴안고 있었는데…
당신은 형식적이지만
시는 언제나 생생한 상징이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타인이었을 텐데…
시는 이별보다 쉽다
당신은 나를 떠난 후에
초라한 애증으로 남았지만
시는 사무치게 황홀한 눈물로 남았다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돌아서지만
시는 내가 필요 없어도 돌아서 있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끝까지 이방인이지만
시는 내게 마침내 필연이다

 화가 일휴.
 화가 일휴.

 

 

 

 

 

 

 

 

 

김숙영 1969년 충북 괴산 출생. 서울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9년 열린시학 신인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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