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세계가 멈췄다. 지난 1년9개월은 문화예술계의 암흑기와 같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에서 전시와 공연은 맥없이 취소되고 예술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무대 위를 달구던 뜨거운 몸짓과 선율이 사라진 그 시간, 수도권 외곽의 한 작은 미술관에는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방역수칙을 꼬박꼬박 지켜가며 전시가 이어지고 연주회가 열렸다. 그렇게 작은 무대를 두고 연주자와 관객들은 소통하고 위로하며 코로나 블루를 이겨내고 있다.

[일간경기=박종란 기자] 파주 탄현면 헤이리 마을 인근에 새롭게 자리한 정문규미술관은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리는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지난 8월 향년 87세로 작고한 정문규 화백은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접하기 힘든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가며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2009년 안산 대부도에 개인 미술관을 설립했다. 

정 화백의 초기 작품세계는 1950년~1960년대 추상주의를 한국적 토속성과 결합한 입체파 추상 시기와 동경예대 유학 시절 인간 내면의 세계를 탐구한 한국적 구상주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 미술을 흡수한 이브 시리즈는 그 독창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2년 정 화백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5년간의 긴 투병 생활 끝에 건강을 회복했는데 바로 투병을 위해 머문 곳이 안산 대부도였다. 그 인연으로 완치 후 이곳에 정문규미술관을 열었으며, 삶에 대한 희망과 감사로 가득 찬 자연을 화폭에 담은 것이 후기 자연 시리즈다. 

미술관 개관 이후 기획한 한국 미술의 1~2세대 화가 대전 '아직도 우린 현역이다', '1980년 인간전 그 이후, 오늘의 동향전' 등의 전시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지역의 사랑받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여기에 개관 초기부터 시작한 음악공연은 정문규미술관을 여타 미술관과 차별화하는 큰 역할을 했다. 다른 미술관에서 열리는 클래식음악회는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정문규미술관의 연주회는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지속성을 가지고 역량 있는 연주자들의 연주가 1년 내내 이어지는 것이다. 

정 화백은 '말러리안'이라는 팬덤을 형성할 만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또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할 정도로 그의 클래식 사랑은 단순 음악 애호가를 넘어선 전문가 수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님의 본업은 화가였으나 진짜 사랑한 건 클래식이었습니다"

잠 많던 사춘기 시절 새벽마다 온 집안을 휘저어대던 클래식 음악에 질려 팝송에 헤비메탈까지 섭렵하며 반항 아닌 반항을 했지만 결국 돌고 돌아 클래식이었다고 말하는 정 화백의 아들 정종산(58) 실장에게 미술관이 전시 공간에 머물지 않고 클래식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는 것은 물이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위에는 정말 실력 있는 작가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전시회나 공연을 할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지역 작가들의 경우는 그 기회가 더욱 적습니다. 그들에게 가교가 돼 주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안산의 자랑으로 20년간 사랑 받아온 정문규미술관의 파주 이전은 지역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기도 했다. 정 실장은 지자체의 지원 중단이 이전의 한 이유라고 밝힌다. "미술관의 수준 높은 전시와 공연이 대부분 무료로 이뤄져 지자체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지원이 중단되면 운영상 한계에 다다릅니다"

파주 재개관 기념전으로 이달 말까지 진행된 'PAST NOW HAJE' 전시회는 파주 하제 창작마을을 거쳐 간 작가들과 현재 입주하고 있는 작가들의 회화와 미디어, 설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오는 10월13일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토크&콘서트 등 굵직굵직한 연주회도 마련돼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공연을 준비하는 연주자들과 관객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공연을 멈출 수가 없다는 정문규미술관은 코로나 위기 상황에도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수준급 공연과 전시를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지역의 실력 있는 신진 예술가들이 걱정 없이 창작과 연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정종산 실장은 이제 파주에서 정문규미술관의 제2막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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