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 무렵
정정례
아침, 풀이 죽는다는 말을 했고 높이를 가진 것들이 길이를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껏해야 매듭의 기세였다고 푸른 것들이 떠나고 나면 얇은 새벽 마른 잎 가장자리마다 사르르 추위를 얹어놓는 상강은 새벽이 제일 얇은 절기다
감국에 하얗게 붙어 동쪽 햇살을 여는 흰 서리 솟아오르는 절기가 지났다고 이제 추위들이 내려앉는다. 아래로 숙이라고 흰 서릿발이 서걱거리면 지상의 구멍들은 그 입구가 분주하다
어리둥절한 온기로 닫힐 구멍들은 한 계절을 잠드는 곳, 물소리들은 그 뼈가 드러날 듯 가늘어지고 멀리 흘러간 물의 머뭇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아래쪽의 길이 넓어진다
돌 밑의 온기들이 모두 돌 속으로 들어간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밟히면 서리 태에 흰 줄기가 생기고 앙상한 고춧대에는 풋고추 몇 개 매콤한 입맛을 달고 있다
지난겨울 잦아졌던 기침소리들이 마을 노인들의 목으로 모여든다 긴 꼬리들이 돌돌 말려지는 때 상강 무렵 마을엔 굴뚝연기가 잦다
정정례 1950년 전남 영암출생, 대전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회, 시집 '시간이 머무른 곳, 숲' '덤불설계도' '한 그릇의 구름' '달은 온 몸이 귀다' 등 있으며, 천강문학상, 한올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삼정문학관 관장으로 한국미술협회 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