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보존된 조선시대 성문

코로나19 여파로 실내 박물관을 들어서기가 꺼려진 이때 수원화성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가을 초입에 들어 푸른 하늘과 함께 수원화성을 걷는 느낌은 또 새롭다.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보물 제402호 팔달문. 팔달문은 코로나19로 실내 박물관에 들어서기에 꺼려진 지금, 한번쯤 방문해서 볼 만한 문화재다. (사진=수원시)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보물 제402호 팔달문. 팔달문은 코로나19로 실내 박물관에 들어서기에 꺼려진 지금, 한번쯤 방문해서 볼 만한 문화재다. (사진=수원시)

 

이처럼 수원 화성은 관광차 오기에도 좋고, 역사를 생각하면서 보기에도 좋다. 비록 코로나 시국으로 올해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은 내년 4월로 연기됐지만, 팔달문은 여전히 수원시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지켜주고 있다.

수원의중심부에 있는 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사적 제3호로 1796년(정조 20)에 완공됐다.

팔달문은 4개 성문 가운데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여장을 돌린 다음 2층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는 다포식이며, 쇠서의 끝이 강하게 위로 솟아 있고 끝이 장식화돼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성문의 좌우에는 적대를 설치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1794년 2월 28일 장안문과 같은 날에 터 닦는 일을 시작했지만 대체로 장안문보다 공정별로 약 1주일 늦게 완성했다. 

팔달문은 축성 당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공사 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판, 현판까지 원형이 잘 남아 있다.강원도 출신 목수 윤사범이 다포를 짜 맞추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 목수는 훗날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를 담당해 근 100년 만에 화성에서 재현했던 다포 건축 기술을 이어 나갔다. 

2013년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했는데 훼손된 목재를 최대한 재사용했다. 부재에 남겨져 있는 전통 기술의 흔적까지 보존한 사례로 손꼽힌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으며.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며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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