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실 기자.
                  이형실 기자.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이다. 국민으로부터 위탁된 정치 권력의 오남용을 견제하는 동시에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공공의 질서와 이익을 도모하는 일,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지배계층에도 구속받지 않아야 된다. 이것이 언론의 자유다.

그렇다면 언론은 사회의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18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크’가 당시 사회 주류계급인 성직자, 귀족, 평민의 3계급에 이어 언론계를 제4계급으로 명명하여 언론의 대외적 위상과 역할을 제시한 이후 대의 민주주의 정치체계에서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어 언론을 제4부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일수록 언론이 천대받거나 무시당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역대 정부 중 언론과 관계가 불편했던 때는 참여정부가 유일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권력으로 언론을 흔들 생각도 없지만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며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고 언론과의 전쟁 포고나 다름없는 언론개혁을 꺼내 들었다. 이러한 노 대통령의 언론 적대 감정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갖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김대중 정부 때 내각에 발탁되면서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2001년 2월6일 기자간담회장에서 한 기자가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에 대해 이회창 총재가 언론탄압이라고 한다”고 말하자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던 노 대통령은 “언론은 더 이상 특권적 영역이 아니다, 언론과 싸울 기개가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언론과의 전쟁 선포를 불사할 때가 됐다”고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소관 부처도 아니면서 굳이 나선 것부터가 그의 험난한 정치 여정이 예견되는 순간이었다. 

이 소신은 2년 후 집권하자마자 바로 시작했다. 특정 기자들만이 사용하던 청와대 기자실을 폐쇄하는 대신 모든 언론인이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브리핑실을 만드는 등 전면적인 언론 공격에 나섰다. 물론 언론들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참여정부의 언론개혁은 상처만 입은 채 참패로 끝났다. 이를 두고 한 정치 평론가는 “정치인들은 언론이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펜대 한 번에 의해 정치생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노통이 언론에 대해 강한 적대감으로 맞서는 용기는 가상하다. 그러나 개혁도 필요하지만 부드러워야 했다”고 회상한다. 이 말마따나 역대 정부들이나 현 정부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언론에 대해 강한 드라이브를 걸지 못하고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을 고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언론과의 전쟁에서 상처만 남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를 무모하게 주도한 노 대통령만의 정신세계는 뭘까. 아마 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려는 마음인 공명심(功名心)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5공 청문회 때 전두환씨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거칠게 공격하던 장면을 연상하면 고개가 끄덕일 것이다. 이러한 공명심은 사심의 한 부분으로 자신만의 컴플렉스를 갖고 있거나 내면이 충실하지 못한 정치인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이 현상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극대화된다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공권력에 공명심이 더하면 비극이 발생하는 법이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전국에 파란색 돌풍이 불었다. 31개 시·군으로 형성된 경기도에도 이 돌풍이 여지없이 강타해 무려 29개 단체장을 싹쓸이했다. 말마따나 파란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돼 자격 미달의 일부 정치인들이 정가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1986년 시로 승격 34년을 맞고 있는 구리시, 서울시와 맞닿은 이 시에도 지난 지방선거 당시 파란 바람에 힘입어 시민운동을 했다던 젊은 시장이 당선됐다. 본인은 2선의 도의원을 바탕으로 구리시를 위해 오랜 기간 일해온 준비된 시장이라고 했다. 취임하기 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그럴듯했다. “시민이 주인…시민과 함께…선거때가 되면 몸을 낮추다가 당선되면 허리를 곧추세우며 시민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은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적…” 참으로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멋진 인터뷰다. 시민들도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민들을 위한 시장이 되어 진영논리로 갈라진 마음들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게 화합된 시를 만들어낼 줄 믿었다.  

그랬는데 취임한 후 전반기를 몇 개월 남겨 둔 시점에서 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의중을 살펴봤다. 대다수 시민의 반응은 ‘네거티브’였다. 심지어 입헌군주처럼, 왕이 통치하는 왕정정치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필시 시민이 주인이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취임 전에 한 ‘인터뷰는 인터뷰일 뿐’이라는 뜻 아닌가. 그동안 이 분(?)이 펼친 다른 분야의 시정은 차후에 거론할 예정이다. 이번엔 굴절되고 공명심에 가득 찬 그만의 언론관을 조명해 본다. 

구리시에는 30여 개 지방언론사 기자들이 주재하고 있다. 다른 시·군들도 마찬가지지만 역대 구리시장들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기자실을 제공하고 관련 부서를 배치해 운영해 왔다. 물론 시민의 세금이 사용된다. 그런데 최근 이 시장은 시민들로 위탁받은 권력을 이용해 기자들의 집필 장소로 사용하는 약 2평의 협소한 기자실을 폐쇄하고 기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아니 내쫓았다는 표현이 맞다. 이러한 사례는 경기도 31개 시·군 단체장 중 유일하다. 헌법에선 ‘국민에게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기자이고 독립적인 편집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인정되는 상식이다. 그래서 무관의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 기자들을 풀뿌리민주주의 기초단체장이 내쳤다.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언론통제다. 어쭙잖은 권력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사례다. 구리시에서만큼은 민주주의가 죽었다.

위에서 제시했듯 참여정부는 언론을 적대시했다. 그러나 이 시장처럼 기자실을 없애고 기자들을 길거리로 쫓아내진 않았다. 정부에서 시장을 임명하는 관선 시절, 구리시에 부임하는 시장의 계급은 부이사관, 3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감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 시장은 공명심에 사로잡혀도 너무 잡힌 느낌이다. 사실 이 시장의 언론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은 취임하기 전부터 회자 됐었다. 취임하자 자신의 눈에 들지 않는 일부 언론을 ‘블랙리스트’로 구분해 관리한다는 소문이 공직사회나 지역사회에 공공연히 나돌았다. 지방자치에 필수예산인 홍보예산도 4분의1로 삭감했다. 그나마 그 홍보예산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자들에게 그것도 금액을 차별 배당해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 

취임한 후 몇 개월이 지나고 시장의 언론 적대감은 노골화됐다. 부서사무실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기자들이 15년 동안 사용하던 브리핑룸을 비워줄 것을 요구, 시청 2층 로비 모퉁이에 2000만원 혈세로 2평 정도 협소한 기사송고실을 만들어 준 뒤 이곳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치적(?)을 외부에 자랑이라도 하듯 경기도의회 의장 등에게 보기에도 옹색한 집필하는 공간을 공개하는 등 기자들의 험한 꼴을 보이는데 서슴치 않았다. 인면수심의 깜찍(?)한 인간을 보는 듯했다. 예견한 것과 같이 브리핑룸을 직원사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기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구실이었다. 사무실이 모자란다는 명분 때문에 내어 준 브리핑룸은 민간감사관실로 둔갑해 자신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공간으로 제공됐다. 이렇게 이리 치고 저리 치듯 브리핑룸에서 쫓겨나 겨우 안착한 2평의 기사송고실도 시장은 눈에 거슬렸는지 최근 시민들을 위한 민원실로 사용한다며 방을 뺄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야멸차게 기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역대 시장들은 ‘신청사를 증축하면 쾌적한 기자실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건물이 완성됐는데도 현재 시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동요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시장은 시청 관리부서를 통해, ‘에코사업’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기사송고실 옆 공간에서 기자회견을 한 시민단체의 회원 6명과 이를 취재한 기자 3명을 주거침입죄로 경찰에 고발했다. 시민이 주인이라고 호들갑 떨 때는 언제고…

참으로 표리부동한 처사다. 이어 구리시의회 의원 2명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가 같은 혐의로 고발됐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선지 이내 취하를 했다. 이처럼 범죄 구성요건도 성립되지 않는데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손쉽게 고발을 한 연유를 뭘까. 시민과 기자들은 왜 취하를 하지 않았을까.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렇듯 취임한 지 채 2년이 안 된 시장의 얄팍한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언론의 흑역사다. 그런데 정작 부끄러운 일은 시장의 노골적인 푸대접에도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곤 다수의 언론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데 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지 않는가.

언론학자들 사이에선 언론을 흔히 개(Watch dog)에 비유한다. 유형으로는 첫 번째가 애완견(Lap dog)으로 권력의 애완견 같은 언론을 뜻한다. 주인의 무릎에 앉아 간식을 받아먹으며 안락함에 취해버린 언론으로 권력 구조에 비판적일 수 없으며 권력에 동화하고 기생하는 언론을 지칭한다. 두 번째 경비견(Guard dog)으로 기득권 구조에 편입돼 권력화되고 그 권력을 지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권력이 약해졌거나 자신의 이익과 반하게 될 때 지키던 대상을 공격하기도 하는 언론을 말한다. 셋째로 슬리핑 독(Sleeping dog)으로 중요한 이슈에도 그냥 눈을 감고 있는 언론이다. 과연 나와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할까 판단해 볼 일이다.        

어떤 단체이건 간에 단체장을 하려면 일정한 실력과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때와 운(運)만 잘 매칭된다면 누구나 낚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에게도 충만한 운과 시의적절한 시기가 온다면 한번 도전해 볼까 싶다. 사실 1995년 고 조정무 국회의원으로부터 정치입문을 권유받은 적이 있긴 하다. 공약은 ‘무엇을 유치하겠다, 뭐를 건설하겠다’ 등의 거창하고 현란한 공약은 되도록 지양하겠다. 대신 ‘진짜로 정말 진짜로 시민들을 섬기겠다’ ‘내 가정보다는 시를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 ‘모든 행정에 있어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책임을 지겠다’는 등의 평범한 공약을 내 걸겠다. 선거 포스터에 여백이 있다면 ‘술에 취해도 시민의 담벼락에 지도를 그리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애교(?)스런 공약도 집어넣겠다. 글쎄, 이 나이에 그런 행운이 올까.

우리는 ‘남을 업신여기고 교만한 사람’을 일컬어 오만방자하다고 한다. 이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 행동이며 시민을 주인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나라이든 간에 교만하고 오만하면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삶의 진수다.

언론의 자유는 단지 민주주의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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