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택 편집위원

여주시의 얼굴로 소개되는 고달사! 애절한 사연과 국보 및 많은 보물들이 잡초속에 방치 되고 있어 보는 이들 저마다에게 안타깝고 애석해 하는 절터다. 
 
국보4호와 많은 보물이 보전되어 있는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高達寺) 복원 대안은 없나? 고달사는 신라후기서 고려초기 창건 된 것으로 전해진 절터엔 국보4호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 浮屠)가 상층이 약간 결손 되었을 뿐 우아하고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외 보물 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귀부-이수, 보물 7호 원종대사 혜진탑(元宗大師 慧眞塔), 보물 8호 고달사지 불좌(高達師址 佛座) 등이 빈 절터에 아름다운 자태로 잡초 속에 보전되어 오고 있어 바라보는 모두에게 안타까움과 허전함을 느끼게 해준다.  

고달사는 발굴조사에서 8세기서 12세기까지의 기와류 수기와와 암기와 수막새·암막새 그리 고 명기와·귀면 등을 출토하고 이외 희청색, 희흑색 토기와 청자·분청·백자 등 자기류를 출토하고 15동의 건물지를 확인해 대사찰터임을 입증하면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고달사는 우두산 중턱에 위치해 있던 사찰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23년에 일명 고달원(高達院)에 의해 창건되어 신라의 유명한 삼원(三院)인 도봉원·희양원·고달원 중 하나로 유명했던 사찰로 전해지면서 복원해야 한다는 이들이 많다.

또 고려시대 광종왕(光宗王)때부터 나라에서 관리하는 특별사찰로 왕실의 비호까지 받은 유명 사찰이었지만 언제 어느 때 폐사(廢寺) 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고달사는 황해도 곡산군 고달산 고달암의 사냥군 고달에 의해 창건되면서 고달의 애달프고 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함흥지방에서 효심이 지극한 고달이라는 사람이 노모와 아내 그리고 외동딸 유달과 4식구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면서 틈틈이 깊은 산중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익힌 석공(石工) 기술이 소문나 고달사 중건(重建)에 석공으로 차출돼 불사 건립에 참여했다,

평소 불심이 두터운 고달은 막중한 불사(佛寺) 건립에 자신이 중건한다는데 감격하여 잡념을 없애기 위해 맑은 물을 떠놓고 100일 불도를 드리고 고향에 있는 부모와 처자식도 잊은 체 작업에만 매진, 돌을 쪼고 쌓고 다듬는 일에만 열중하여 기묘한 조법으로 절을 완공했다  

하지만 고향에 있는 아내 달여(達如)는 어려운 생활을 이어오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기다림에 지치고 생활은 지속적으로 어려워 딸, 유달을 업고 엄동설한에 오직 남편을 만난다는 일념으로 물어물어 천리 길을 멀다않고 인근 양평(楊平)까지 왔으나 추위와 굶주림에 딸을 잃고 말았다.

딸을 잃고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달사를 찾아왔으나 불사에 몰두한 남편 고달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편을 만나지 못한 달여는 가슴깊이 파고드는 슬픔과외로움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몹시 시달린 달여는 남한강변에서 그만 객사 하고 말았다.

한편 고달은 불사건립을 끝내고 그립고 그리운 고향을 찾았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과 아내는 자신을 찾아 떠났다 하여 고달사로 돌아와 수소문 끝에 딸은 양평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죽고 아내는 고달사에서 10km 떨어진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 강변서 객사한 것을 확인했다,

이같이 아내와 딸이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인생에 대한 혐오(嫌惡)와 회의(懷疑)를 느끼고 떠나갔을 아내와 딸의 시신을 찾아 보통리 양지바른 산기슭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현재 고달의 아내가 원통하게 죽었다하여 이곳 지명이 '원통‘ 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달은 그길로 대사의 제자로 들어가 중이 되어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도에만 전념하며 죽은 아내와 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달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사를 완성하였다하여 석공 고달의 이름을 따서 사명(寺名)을 고달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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