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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의 역사 ‘8.10 광주 대단지 사건’ ①] 무허 판자촌 철거로 강제이주당한 10만여 流民들의 절규!땅값 일시불- 각종 조세 부과, 경기도는 세금 독촉…5만여명 주민들 분노폭발하자 주민요구 전폭 수용
  • 정연무 기자
  • 승인 2019.07.0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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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가 몸을 던져 이루어낸 ‘희생의 바탕’ 위에 살고 있다.

그로 인해 굳게 자리한 초석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8.10 광주 대단지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에 큰 고통을 남긴 상처이다.

아직도 그 상처는 다 아물지 못하고 응어리도 풀리지 않았다.

해방이후 최초의 도시민중 봉기인 ‘이날의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본지는 발생 원인과 경과 그리고 역사적 의미 등을 2회로 나누어 재해석하고자 한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는 서울특별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 계획에 들어갔다 <사진=성남시청>

◇ “차별과 억압, 공포와 배제의 기억‘1971년 8월10일’
▶“광주 대단지 사건은 개발독재시대의 대표적인 참사다”

그러나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제대로 아는 이들도 많지 않다.

19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의 무허가 판자촌 철거계획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신개발 지역(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으로 강제이주당한 10만여 도시빈민들이 삶의 벼랑 끝에서 최소한의 자활 대책을 촉구한 생존권 차원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이들의 울부짖음은 개발독재시대의 대표적인 독재 권력의 폭력으로 기억돼야 마땅하다.

▶가난에 울고 , 당국의 속임에 두 번 운 ‘유민(流民)’들

1960년대 서울시는 철거민 대책 중의 하나로 정착지 조성을 통한 ‘이주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군 중부면의 일부가 광주대단지로 지정되었다. 1969년 9월 1일부터 철거민 이주가 이루어졌고, 서울시는 땅을 분양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기반 시설을 전혀 조성하지 않았고, 이주민들은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천막이나 판잣집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1971년 6월 조사 당시 취업대상자의 5%만이 단지 내에서 직업을 가질 정도로 지역경제기반조차 없었다. 하지만 살 곳을 찾던 각 지역 빈민의 유입이 급증하였고, 1971년 8월경의 거주인구는 15∼17만 명까지 늘어났다.

당초 서울시는 강제 이주시킨 철거민들에게 1가구당 20평씩 평당 2000원에 분양해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다. 그러나 토지 투기 붐이 일면서 6343가구의 전매 입주자가 정착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자, 이들에게 평당 8000~1만 6000원에 이르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한 데다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조세를 부과했다.

이주민들은 대지가격 인하 및 분할상환, 구호대책 마련 등을 담은 대 정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에 대한 응답 없이 분양가격 인상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경기도는 세금을 독촉하였다.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광주대단지사건, 경찰병력이 투입되었지만, 빈민들의 분노는 저지할 수 없었다. <사진=성남시청>

▶산산히 깨진 ‘낙원(樂園)’의 꿈’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엔 5만여명의 주민이 몰려들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11시에 주민대표와 양택식(梁鐸植) 당시 서울시장이 면담하기로 예정된 시간에 앞서 그들은 ‘배가 고파 못살겠다’, ‘일자리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웅성거렸다. 양 시장은 약속시간에 오지 않았다.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출장소를 불태우고 차량 20대를 불태웠다. 전투경찰 700명이 투입되었지만, 저지하지 못했다. 첫날은 경찰과 5시간 대치했다.

주민들은 이후 광주대단지를 초토화시킨 후 주변을 지나가던 승용차, 택시, 버스들을 가로막아 멈춰세운 뒤 탑승객들을 모조리 끌어내고 탈취했다.

그들은 차량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정부는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에 보내 주민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아울러 주민 대표들에게 정식 사과했다. 8월 12일 양택식 서울 시장은 담화를 통해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했다.

시위는 사흘 만에 진정되었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명예회복

역사는 종종 우리의 뼈마디 사이로 스며들어와 ‘사회 구성원’과 ‘대표’의 역할을 상기 시킨다.

각설하고,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백여 명이 부상하고 22명이 구속됐으며 한명은 다음해 미성년으로 불기소 처분돼 석방되고 21명은 기소돼 다음해 1월 실형 2명, 집행유예 18명, 무죄 1명이 선고됐다.

이들의 주장은 단지 다음과 같았을 뿐이었다. “대지를 무상으로 해줄 것, 세금을 면제시켜 줄 것, 시급한 민생고를 서울시에서 해결해 줄 것”

‘광주대단지 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도시빈민, 철거민, 도시 재개발, 부동산 투기 등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지배세력들이 급조한 도시산업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모순들을 해소하고자하는 과정에서 온전한 생존권을 이중적으로 박탈당한 정착지 주민들의 조직적 저항운동”이 이사건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정권의 통치세력이 도시차원에서 행사한 국가폭력에 정착지 이주민들의 저항이 최대치로 들어난 자연발생적 도시민중 봉기로 기억되어야 하며 빈민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정연무 기자  jongym@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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