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위(단종과 수양),181.5x226.5cm,Acrylic on Canvas, 2014

처음에는 그저 우울함을 달래려고, "서울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1986년 여름, 강원도 영월에서 만난 친구는 시원한 강물에 발을 담근 그에게 그곳 청령포에 대해 들려 줬다.

단종이 유배됐던 장소로,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시신이 지방관리 엄흥도에 의해 수습된 곳. 청령포의 역사를 듣는 순간 그는 "확 정신이 깼다."

이전부터 "서양 미술이나 문학에서는 그리스 비극이 중요한 주제 의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우리 미술에서는 그런 것을 많이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그였다.오랫동안 생각했던 주제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까.

그는 그 뒤로 28년째 단종을 주제로 지속적으로 작업해 오고 있다. 역사화에 몰두한 화가 서용선(63)의 얘기다.

▲ 처형장가는길,750x480cm,Acrylic on Canvas, 2014

서용선의 개인전 '역사적 상상_서용선의 단종실록'전이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 내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전시를 통해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에 따른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그린 작품을 선보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에 초점을 맞춘 신작과 역사적 장소를 그린 '역사 풍경화'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최근 만난 작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 왜 표현을 안 했는가가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관련 서적과 논문을 계속 탐구하고 역사적 흔적이 남은 지역을 수십년 간 답사해 온 작가는 그림을 통해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역사를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숙고하며 재현한다.

그러다 보니 처형장에 끌려가는 사육신의 모습과 이들의 시신을 거둔 김시습,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이 유배갔던 영월의 풍경 등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 한 화면에 재구성되기도 한다.

작가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긴밀한 연결을 위해 화면을 가로지르며 휘어져 흐르는 강물 등으로 화면을 과감히 분할하고 붉은색 등 화려한 색채로 강렬하게 표현한다.

단종이 유배됐다가 죽은 청령포를 비롯해 김시습이 단종의 영혼을 위해 제를 지냈다는 동학사 경내 숙모전, 단종 복위에 실패하고 숨진 이들의 시신을 달래고자 글자를 새겨 넣은 '경(敬)자 바위' 등의 풍경화는 비극적 사건을 기념하는 역사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작가는 "감상적인 슬픔에 빠지는 것은 경계하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게 아닐지, 우리가 이념이나 습관에 따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삶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답사 과정을 담은 영상물과 관련 서적 등 작가가 그동안 모은 단종 관련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

갤러리에서 미술관으로 새출발하는 화이트블럭의 첫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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