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세정과장 강구인

우리 고향 바로 옆 동네는 가정(稼亭)리다.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 부친이기도 한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이 원나라의 동녀(童女)차출에 반대하다가 귀양 살았던 데서 마을이름이 유래한다. 내 고향 여주시 남한강변 이호(梨湖)리. 지금은 강천보와 목아(木芽)박물관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내 추억엔 그저 정겨운 남한강 중류의 강촌(江村)마을이다. 비록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서예를 배우면서 호(號)를 이호(梨湖)로 사용하고 있다. 가정(稼亭)선생에게서 마을이름이 유래된 반면, 나는 좀 무례하지만 역발상으로 고향 이름에서 허락도 없이 차용했다.

그 가정(稼亭)선생의 차마설(借馬說)이란 수필에 내가 좋아하는 무소유(無所有)의 의미가 있다. 선생 집이 가난해 말을 빌려 타곤 하는데, 비루한 말이면 비록 급해도 채찍질을 못하고 조심스럽게 가므로 위험한 일이 적었고, 어쩌다 준마를 빌리면 마음대로 채찍질하여 장쾌히 달렸으나 오히려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다 하면서,

사람이 가진 것은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婢僕)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빌린 것이 도로 돌아가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百乘)을 가졌던 신하도 외로운 신세가 되니, 하물며 그보다 더 미약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올 연말로 공인에서 자연인으로 귀거(歸去)하는 이 후진에게 하시는 따끔한 말씀 같기도 하다. 그것도 꼴란 권력이라고 젠체나 안했나 모르겠다. 저는 미진하나마 무소유(無所有)란 말로 답을 드리려 합니다.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無所有)에 보면 ‘장도(長途)를 떠나는데 기르던 난초(蘭草)가 걱정되어 지인에게 주고 떠나니 맘이 편했다’라는 대목이 나의 뇌리 속에 30여년을 맴돌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가 확연해지는 듯하다.

지난 30년 되짚어보니,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모르겠다. 선배들 말로는 공무원은 끝나고 나면 위장병과 수건만 남는다 했는데, 집에 수건은 많이 쌓인 듯하다. 높은 도덕성과 국가관을 요구하는 공직을 투철한 사명감으로 임했어야 하는데, 나는 호구지책에 더 절실함으로 임했던 날들이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다. 정신없이 그리 30성상을 지내오며 혼인하고 자식 낳아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니, 덩달아 나도 공무원을 졸업한다. 이것이 그 때는 모르며 꿈꾸던 장밋빛 인생이라는 것인가?

철들자 망령이라 했던가. 올 초에 명퇴의 마음을 굳히면서 거창하게 일년지계(一年之計)를 세웠다. 1.한자급수, 2.서예작품전, 3.서예공모전 출품, 4.밴드동아리 공연, 5.한자 방과 후 교사...... 이 다섯 가지 중에 앞의 네 가지는 미흡하나마 완료형이 됐는데, 마지막 방과 후 교사만 아직 진행형이다. 내 생활에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살아본 경우가 극히 이례적이다. 여하튼 그저 모든 것 내려놓자 맘먹으니 그렇게 바쁘기만 하던 맘으로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족욕(足浴)의 이완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동안 미력한 나와 함께 공직생활을 하며 동고동락(同苦同樂)의 의미를 나누시던 동료선후배분들과 내가 공직을 탈(頉)없이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신 용인(龍仁)의 모든 분들, 가족친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한꺼번에 드리며 좋은 추억만 오래도록 무소유(無所有)와 중첩시키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재해석한 왕유(王維)의 수장소부(酬張少府)라는 시 한수 바칩니다. 느껴지시나요? 흔적 없는 바람 같은 인생이.

모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찬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해가 되길 빌겠습니다.

 

晩年唯好靜(만년유호정) 만년에 고요만이 좋아져

萬事不關心(만사불관심) 세상만사 관심 없소.

自顧無長策(자고무장책) 아무리 쥐어짜도 뾰족한 수 없어

空知返舊林(공지반구림)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았네.

松風吹解帶(송풍취해대) 솔바람 불어오매 허리띠를 풀어 제치니

山月照彈琴(산월조탄금) 앞산의 달빛이 기타 치는 나를 비추오.

君問窮通理(군문궁통리) 그대여 출세 방법일랑 묻질 말고

漁歌入浦深(어가입포심) 포구에 흩어지는 어부가나 들어 보소.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