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완 편집위원

고등학교 다닐 때 일이다. 같은반 친구중에 계양리 바닷가에 사는 친구가 있어 친구 집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평택에 살면서 처음으로 팽성을 간 것이다. 가는 길이 왜이리 멀던지 가는 시내버스는 덜컹덜컹 비포장도로에서 날리는 먼지를 먹으며 도착해 보니 이런곳도 있었구나 했다, 도착 할 즈음에 거리에 보이는 옛건물이 눈에 들어왔는데 들녘에 펼쳐진 붉그스럽게 수그들어진 낙엽이 왜이리 이쁘게 보일까 한폭의 풍경화 그림처럼 펼쳐진 팽성은 인상 깊은곳 이었다. 내가 살고있던 송탄과 공통점은 미군기지가 있다는 것이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이국적인 도시, 낮설지 않은 미군기지 주변환경의 생활문화가 송탄보다 더 시골적인 거리모습 풍경이었다, 팽성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기지를 건설한 것은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51년 한국정부는 한반도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안정리 비행장을 미군에게 공여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매스컴에서 큰이슈가 되고 있는 지역이다. 캠프 험프리즈(Camp Humphreys)로도 유명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2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이곳이 평택의 본향은 평택현(平澤縣) 팽성(彭城)이 아니던가 ?

팽성은 조선시대까지 평택현의 향교동이었다. 다시 말을하면 팽성은 평택현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평택향교와 객사가 있다고 해서 객사리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팽성군 지역이었다. 조선시대까지는 평택 그 자체였다. 팽성읍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평택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 중 (서부)안중권의 읍면들은 모두 수원군에 속했고, 남부(평택권)의 동(洞)들은 양성현, 안성군에 속했고, 북부(송탄권)의 동·읍·면들은 모두 진위군에 속했다. 심지어 행정 신평동, 원평동, 통복동 지역도 원래는 평택과 전혀 관련 없는 진위 땅이었다 ! 신평동, 원평동 유래에 아픈 역사가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평택현은 삼국시대 백제때 충청도 아술현(牙述縣)(지금“아산시”)에서, 하팔현(河八縣)이었다, 하팔현은 평택현의 처음으로 불러진 지명이고 서부 및 서북부는 옛 수원도호부였고, 동부 및 동북부는 옛 진위현 지역이었다. 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년) 평택현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영현이 됐다. 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하팔현이라는 명칭이 평택현으로 바뀌었다. 1018년(현종 9년) 천안(天安)부의 속현이 됐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통일신라때 독립된 충청도 평택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팽성이라는 속명도 함께 사용되었으며 팽성읍의 지명이 변화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년) 현감으로 바꾸었고 충청도에 속했다. <경국대전>에 평택현은 종6품 현감이 있으며 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했다. 1505년(연산군 11년) 6월 평택현·직산현·진천현·아산현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옮겼다. 1596년(선조 29년) 왜구 침입으로 고을이 쇠잔해지자 평택현을 혁파해 직산에 예속시켰다가 1610년(광해군 2년)에 다시 설치했다. 읍호(邑號)는 팽성이라고도 한다. 조선후기에 현내면(縣內面)·동면(東面)·서면(西面)·남면(南面)·북면(北面)·소북면(小北面) 등 6개  면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년)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의 제안으로 충청도의 평택현을 직산현에 합치는 논의가 있었으나 같은 해 지방제도 개편으로 평택현은 평택군이 돼 공주부에 속했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편제해 충청남도 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이때가 오늘날의 지방행정구역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들어서면서 1914년 3월 1일 전국을 12부218군으로 나누는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다. 그결과 현재의 팽성읍 지역은 부군면 통폐합 때 평택군 읍내면·동면·서면을 병합하여 진위군 부용면(신궁리,두리,객사리,평궁리,추팔리,노와리,석봉리,신호리,근내리,원정리,동창리,내리)이라 하고 평택군 군서면·군남면·경양면·동면 일부를 병합하여 서면(함정리,대추리,안정리,송화리,서근리,두정리,노성리,대사리,도두리,신대리,본정리,노양리,남산리)이라 하였으나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을 통합하여 팽성면이라 불렀다. 팽성은 평택의 옛 명칭인데, 평택면이 아닌 팽성면으로 통합된 이유는 일제가 1931년 병남면(지금의 평택시가지)을 평택면으로 개칭했기 때문이다.1972년 9월 1일 평택군 조례 제330호로 평택군 안정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팽성면이 팽성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 2월 5일 평택군 안정출장소를 폐지하고 팽성읍 안정출장소로 변경하였다. 고 평택시사에 기록되어 있다

최근 들어와서 이곳 지역에서 정통성을 살리는 문화를 꽃 피우기 시작하고 있다, 한미 친선 한마음축제, 마토예술제, 평택향교문화제, 평택 팽성객사 – 임금님 만나러 가는길 망궐례 재현, 객사 콘서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행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특정 시민단체과 특정인 활동 반경의 역할이 한몫 거들고 있지 않는가 싶다. 부정적인 시각만 아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야 하겠지만 지역의 불균형적인 문화적 편식은 결코 좋은일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평택시청 부근에 가면 평택로와 중앙로가 있다, 위치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봐도 중앙도 아니고 평택의 본향이 아닌데 어찌 전혀 다른 곳에 이런 지명과 도로명이 생겨났는지 의구심을 안 갖을 수가 없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팽성읍지, 진위향교지, 평택향교지, 포털사이트 “네이버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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