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완 칼럼] 진위향교와 평택향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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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완 칼럼] 진위향교와 평택향교 이야기
  • 일간경기
  • 승인 2018.10.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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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완 편집위원

지난 10월6일(음력8월27일) 토요일 태풍 비가 내리던 날. 진위향교 전교님과 집례보는 선배님의 긴급 호출 명령이 떨어져 비바람을 맞으며 진위향교로 단숨에 달려가 석전대제를 지내는 것을 지켜보고 왔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이 되면 어김없이 산천이나 공자를 모신 문묘, 5성 송조 4현 한국 18현의 배향 위패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석전대제를 의식한다. 석전대제 의식을 지내는 것을 알았지만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는 많은 유생과 지역주민이 동참하였는데 시대가 말해 주듯 서서히 잊혀가는 석전대제라고 한다. 진위향교는 진위천 넘어 은연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며 붉그스럽게 물들어가는 진위들녘과 불악산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를 한고을에 하나씩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향교가 무엇인가?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서양무(東西兩廡)·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였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다. 향교 입적자에게만 과거 응시의 자격이 주어졌으며, 소과에 입격하면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을 나갈 수 있었다. 1894년(고종31)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케 하였다.

평택시에는 진위향교와 평택항교 두군데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진위현과 평택현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평택현의 관할이 충청도와 경기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일제 감정기에 경기도로 소속이 확정되면서 진위현과 통합하게 되자, 현재처럼 팽성읍에 평택향교가, 진위면에는 진위향교가 남아있게 되었다

진위향교는 태조 7년(1398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병자호란(1636년)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후 교하리(校下吏) 최응수가 위패만 보존하여 초가집에 두어 간을 지어 봉안하다가 인조 22년(1644년) 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현종 2년(1660년) 현령 송박이 대청을, 헌종 5년(1839년)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고종 26년(1889년)에 비로소 전면적인 개보수를 하였다. 건물 가운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건물은 ‘대성전’이 유일하다. 따라서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된 것은 진위향교 전체가 아닌 ‘대성전(大成殿)’으로, 이같은 사실은 진위향교의 역사적 부침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평택향교는 조선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축된다, 향교지(鄕校志)에는 태조 7년(1398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왕이 조서(詔書)를 내려 지방에 향교 설치를 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 모든 고을에 향교가 설치된 것에 세종(世宗)때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할수 없다, 어쨌든 평택향교는 임진왜란때 고을 전체가 불타면서 소실되었고 전란후 복구하였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문묘인 대성전만 중수하였다. 팽성읍, 현덕면, 포승면유도회에서 석전의식을 치르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평택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안중읍의 경우 수원군에 속했고, 진위면의 경우 별도의 행정구역인 ‘진위현’이 자리했다. 따라서 우리가 평택이라고 이야기하는 곳은 현 팽성읍 일대를 조선시대에 ‘평택현’으로 불렸는데, 이같은 사실은 1861년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 평택현의 관아가 있던 곳은 지금의 팽성읍사무소로, 현재 관아의 건물 중 유일하게 ‘팽성읍 객사(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가 남아 있다. 보통 관아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일제의 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파괴을 피하지 못하고 대개 헐린 자리에는 면사무소나 경찰서, 학교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옛 진위현의 관아 역시 마찬가지다, 아쉽게도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진위현지도(1872)’를 봐야 하는데, 지도를 통해 고을 수령이 업무를 보는 동헌을 비롯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객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동헌의 자리는 현 진위면사무소로 추정되며, 진위현 객사의 경우 최종적으로 진위면사무소에 세워진 비석만이 이곳을 옛 진위현의 관아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항상 누차에 밝히지만 문화의 도시, 인문학이 살아있는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스토렐링문화관광투어를 실시하고 복원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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