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한양 길목… 고려때 ‘40년간 수도’로 몽골과 결사 항전

강화 초지대교 인근의 초지돈대. 1875년 운요오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연합뉴스 제공)

강화도는 조선 중기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다. 고려 때도 40년간 수도이면서 몽골에 결사 항전했다.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을 꿈꾼 조선 19대왕 숙종(1661~1720)은 강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군사 시설 확충에 나섰다.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49곳에 돈대를 쌓았다. 오늘날 강화도 대부분의 군사 시설은 숙종때 지어지거나 보강됐다. 조선 후기 서양 세력과 충돌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웠다.

◆강화도에 지역사령부 진무영

1674년 왕위에 오른 숙종은 1720년까지 46년간 재임하면서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1700년 숙종은 서해 해상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군영인 진무영(鎭撫營)을 강화도에 창설했다. 오늘날 지역 사령부에 해당하는 격으로 대장인 진무사는 강화유수가 맡았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심을 가질 만큼 강화도가 그만큼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강화에 본부가 있었던 진무영은 인근 부평과 통진 김포 교하 고양은 물론 한때 멀리 평택 충청도 예산과 온양 아산 당진까지 관할했다. 진무영 설립 이전에 강화는 지방군인 속오군이 400~500명 정도였다.

진무영 관원으로 진무사(鎭撫使·정2품 강화유수가 겸임) 1원, 중군(中軍·정3품) 14명, 진영장(鎭營將·정3품)이 5원인데 전영장은 부평부사(富平府使), 좌영장은 통진부사(通津府使), 중영장은 강화부의 중군, 우영장은 인천부사(仁川府使), 후영장은 연안부사(延安府使)가 겸직했다.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침입이 잦아지자 진무영은 국방상 중요한 군영으로 취급되어 조정에서는 진무영의 지위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시키고 기구를 대폭 강화했다. 체제는 강화유수가 겸임하는 진무사 밑에 정3품의 중군 1인과 상영대솔군관(上營帶率軍官) 3인, 중영대솔군관(中營帶率軍官) 2인을 두었다. 소관부대로는 종전에 경기수영하에 있던 각 진(鎭)이 이속되었으며, 병력은 포군(砲軍)을 중심으로 하여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재정은 사복시의 세납전(稅納錢)을 비롯하여 많은 재원이 할당되었다. 특히 1871년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심도포량미(沁都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제정하여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조선후기 강화도의 군사력이 강화된 데는 대원군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강화도의 방비 조치는 대원군이 실각하자 강화유수를 다시 문관 출신이 맡는 등 약해진다. 지방군의 중추세력을 이루었고 군사력의 충실함은 중앙군을 능가했던 진무영은 1874년 이전 군사 편제로 환원되면서 역할이 크게 줄어든다. 1887년(고종 24)에 심영(沁營)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강화도, 서울로 가는 길목

1679년 조선 숙종대 만들어진 손돌목 돈대.

땅과 하늘의 교통로가 없던 시절 바다와 강은 모든 길이었다. 조선시대 서해 한강 초입에 있는 강화는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일본과 서양 세력이 조선과 조약을 맺기 접촉하려 마주친 곳이 강화도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이 모두 강화에서 일어났다. 강화도에서 우리나라 첫 조약이 맺어진 것도 지정학적 요건과 밀접하다. 강화가 허물어지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다.

강화도는 행정구역으로 인천시 강화군이다. 강화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보면 세 갈래의 물줄기가 표시돼 있다. 강화도로 흘러들어오는 세 개의 강을 뜻한다.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다. 예성강은 개성으로, 한강은 서울로 연결된다. 고려든, 조선이든 강화도는 인후(咽喉), 즉 도읍지로 가는 목구멍 역할을 했다. 적이 서해 바닷길로 쳐들어와 강화도 해상을 돌파하면 개성과 한양에 닿을 수 있다. 1860년 서양 세력과 대결을 벌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강화도에서 일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육지에서 적이 도읍지로 침략하면 피란을 하기에 적당했다. 고려가 몽골과 항쟁하며 40년간 강화도를 도읍지로 하고 버틴 것도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1627년 후금의 공격을 받은 조선 정부는 강화도에서 무난하게 화약을 맺었다. 서양 무력과 직접 충돌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은 가까스로 버텨냈다. 강화도는 조선 후기 외국 세력이 물밀 듯이 닥치면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강화도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5진 7보 53돈대’ 다. 진과 보는 큰 규모의 군사시설이며 돈대는 10여 명의 군사가 지키는 작은 군사시설이다. 오늘날 해안 초소인 셈이다. 강화도는 진지 포대 숫자에서 알 수 있듯 섬 전체가 군사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00여명이 석달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1679년 쌓아진 굴암돈대는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하일돈대’로 불린다. 다른 돈대들이 진이나 보에 속했던 것과 달리 굴암돈대는 진무영에서 직접 관리하는 영문 소속 돈대였다. 반원형 구조로 둘레가 115m이고, 석벽의 높이는 130~460㎝이다.

교동도엔 경기 황해 충청 수군 관할 삼도수군통어영지 있어

교동도에 있는 삼도수군통어영지 표지판.

교동도는 삼국시대부터 교동으로 불려왔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수군절도부가 옮겨와 수도수비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동향교에서 남서쪽으로 1㎞거리에 위치해 있는 남산포엔 조선 인조대에 설치된 삼도수군통어영지가 있다. 당시 이곳에는 수도인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옮겨와 설치했다고 한다. 정묘호란을 겪은 인조는 1633년(인조 11년) 삼도수군통어영을 남산포 서쪽해안에 설치했다. 이는 곧 강화도와 더불어 교동도가 군사적요충지로 여겨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 황해, 충청 3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통제어영이 있던 흔적을 남산포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시대 군함들이 정박했던 포구에는 폐기된 어망과 각종 쓰레기에 포구 한쪽을 내어준 채 안내표지판 하나만 쓸쓸이 이 곳이 삼도수군통제어영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남산포 인근에는 당시 배를 정박시킬 때 묶어놓던 돌인 계류석 1기가 현존해 쓸쓸히 이곳이 삼도수군통여영지가 있던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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