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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이야기] 파주와 황희청백리 최고 명재상…“네 말도, 그대 말도 모두 옳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8.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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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대표로 꼽히는 재상인 조선의 황희(黃喜·1363 ~ 1452) 정승을 기리기 위한 ‘제3회 방촌문화제’가 얼마전 파주 황희선생유적지 일대에서 열렸다. 파주와 황희 정승은 인연이 깊다. 황희 정승은 젊은 날 파주에서 관리를 지냈으며 말년을 파주에서 보냈다. 파주에 기념관과 묘지가 있다.

◆소신과 관용의 리더십을 갖춘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다. 황희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인136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렸다. 이후 조선 태종때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업적을 남겼다. 세종 대에는 20여 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으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대왕이 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이바지했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해 조선 건국 초기 안정에 기여하였다. 오늘날에도 최고의 명재상으로 황희가 첫 손에 꼽힌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예우는 상당했다. 그가 예조판서였을 때 병이 들었다. 태종은 내의(內醫) 김조와 조청 등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조석으로 안부를 물었다.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이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니 참으로 재상이다. 그대들이 병을 치료했으니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긴다”고 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황희는 세종 즉위 즈음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문제와 관련해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세종의 부름에 응해 조정에 나왔다. 만약 황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면 세종은 왕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 후 황희를 불러들여 다시 고위직에 임명했다. 황희는 이후 예조판서를 비롯해 20년 이상 재상을 지냈다. 1452년 그가 사망한 직후에 작성된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고 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청렴함 대명사

황희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이 청빈함을 보였거나 관용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 것이다.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다.

다음은 대표적 일화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싸우다 잠시 한 여종이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했다.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했다. 옆에 있던 황희의 조카가 “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손꼽힌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될 때 황희가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자리를 벗어났다.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낡은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

파주에는 황희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여럿 있다. 반구정은 황희가 관직에 물러나 말년을 보낸 곳이다. 황희 선생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기념관과 영정이 있는 영당, 묘지가 모두 파주에 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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