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아버님이 큰 사업 하시는구나”

농촌에서 살다가 도회지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 이야기다. 도회지에 와보니 얼굴 색깔부터 달랐다. 모두 집안도 빵빵해 보였다. 새 학기라서 담임선생님은 가정환경 조사서를 내줬다. 티브이, 라디오는 당연히 있었고, 그 학생은 자동차에도 또렷하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데 부모님의 직업란에서 한참을 고민하며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모님은 시장 난전을 도는 장돌뱅이 뻥튀기 장사였다. 그 학생은 생각 끝에 직업란에 ‘곡물 팽창업’이라고 거침없이 써서 냈다. 선생님은 “아버님이 큰 사업을 하시는구나.” 하시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처럼 우리말은 잘 갈고 다듬어 쓰면 빛을 발한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도 이렇게 글로 옮겨봤다. 지금으로부터 572년 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라는 아름답고 과학적인 훌륭한 ‘한글’을 만드셨다. 머리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쉽게 익혀 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라면서 백성들을 걱정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고 집현전 학자 정인지도 꼬리 글까지 달아주면서 널리 익혀 쓰라고 장려했다. 지금 우리는 그분들의 덕택으로 손쉽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과 글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며 소통한다. 이참에 세종대왕님과 톡톡 ‘톡’하고 싶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되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되요’ ‘김치찌개, ‘김치찌게’ ‘몇일, 며칠’ ‘왠만하면, 웬만하면’ ‘다행이, 다행히’ ‘오랫만에, 오랜만에’도 무엇이 맞는지 헷갈린다. ‘탱큐, 오케이, 댄스, 밀크’처럼 외국어지만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앙코르, 앵콜’, ‘리더십, ‘리더쉽’ ‘주스, ‘쥬스’도 섞어 쓴다. ‘텔레비전’을 ‘텔레비젼’이라고 쓰기도 하고 ‘티브이’도 아니고 아예 ‘티비’라고 간단하게 읽고 쓴다. 예전에도 유명 정치인을 DJ, YS, JP, 요즘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도 ‘이니, 여니’라면서 이름의 뒷글자만 풀어서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글쎄올시다.

‘대∽한민국’인가 ‘한반도’인가

대기업체나 공기업도 ‘국제화 시대’ 운운하며 너도나도 한글이 아닌 영어로 사업체의 이름을 바꾸고 있다. 포항제철 포스코(POSCO), 한국통신공사 케이티(KT), SK, LG, CJ제일제당 등등 주변을 둘러보면 외국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러다 보니 벤처산업이나 구멍가게까지도 그게 살길인가 싶어 외국어로 바꾸고 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이름이야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못 찾아오게 그랬다고 치고, 먹고 마시는 식품, 입는 옷, 어린이용 장난감까지 외래어투성이다. 우리나라에서 발행하는 신문, 잡지는 물론 문학작품이나 평론의 용어에서 외국어로 버무려져야 수준 높고 유식한 줄로 안다. 외국인들도 ‘대∽한민국’으로 아는데 우리는 태극기조차 떳떳하게 앞세우지 못하고 ‘한반도’라는 얼치기를 용케 데려와 통일의 꿈에 젖었다. 물론 분단의 아픔이지만, 한글만큼은 절대로 반 토막 내지 말고 갈고 닦고 빛나게 해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들은 우리말 우리글에서는 맞춤법, 띄어쓰기가 틀려도 무감각하면서 외국어는 철자 하나만 틀려도 깜짝 놀라면서 호들갑을 떨어댄다. 먹물깨나 먹었다는 사람들은 대화할 때도 혓바닥을 굴리거나 꼬면서 영어나 프랑스어를 섞어 쓰면서 유식한체한다. 요즘은 인터넷, 휴대전화 등으로 쉴 새 없이 소통한다. 특히 휴대전화는 갑자기 잃어버린 사람 빼고는 전 국민이 하나씩은 다 품에 있는 필수품이 됐다. 그것으로 사용하는 대화를 보면 때로는 말도 글도 아니다. 이상한 조어나 속어, 외계어, 축약어를 서슴없이 쓴다. 한글, 영어, 한자, 일본어는 물론 특수문자 등을 조합한 암호 같은 외계어도 그들끼리는 재밌게 통하는 모양이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욕으로 뱉는다. 한마디로 밑도 끝도 없이 엉망진창이라서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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