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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이야기] 포천과 장준하“장준하 민주화정신 계승” 포천시 적극 앞장
  • 이두 기자
  • 승인 2018.09.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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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와 장준하100년위원회의 협약식.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정치가·민주화운동가였던 장준하(1918∼1975)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조국 사랑 정신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포천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장준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후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다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목숨을 잃었다. 포천시는 최근 장준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장준하 100년 위원회’(위원장 장호권)와 상호협력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포천, 장준하 정신 계승

포천시와 장준하위원회 협약식에는 박윤국 포천시장과 ‘장준하 100년 위원회’ 장호권 위원장 및 조용춘 포천시의회 의장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협약식은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장준하 100년 위원회’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다양한 공익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포천시에 제안한 사항에 대하여 상호협력을 통해 이뤄나가자는 취지에 동참코자 이뤄졌다.

포천시는 ▲범정부 차원의 독립·호국 및 민주화 관련 기념사업 추진 ▲문화재 지정 ▲약사계곡 정비 및 홍보 ▲평화관 건립사업 등 다방면에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공익사업을 준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장준하 평화관'을 건립하고 약사계곡 입구에서 선생이 숨진 채 발견된 검안바위까지 1.5㎞ 산길을 정비해 '장준하 등불길'로 이름 짓는 등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업을 할 방침이다.

박윤국 시장은 “포천시와 장준하 100년 위원회가 합심해 장준하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하나씩 만들어감으로써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준하 100년 위원회 장호권 위원장은 “포천시와 적극 협력하여 장준하 선생님의 정신이 깃든 다양한 공익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에 나섰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권력기관에 의한 타살 의혹이 제기됐으며 2012년 묘 이장 과정에 유골을 검사하면서 두개골 오른쪽 뒤에 구멍이 확인돼 타살 의혹이 다시 불거지기도 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 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 기록 폐기, 수사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12년 8월 파주시가 추모공원으로 조성한 통일공원으로 옮겨졌다.

◆강제 징집 일본군 탈출해 광복군으로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선천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에서 유학중이다 일본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쓰저우(徐州)지구에 배속됐다. 6개월 만에 탈출해 한국광복군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1월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해 곧바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됐다.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특파됐으나 작전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1945년 12월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이 됐으며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을 창간했다.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했다. 이듬해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됐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재야인사들과 함께 잇달아 민주화운동에 참가해 10여 차례 투옥됐다.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는 내용이었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그의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기념사업회는 매년 1∼2회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따라 가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행사를 열고 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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