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경기

상단여백
HOME 메트로 인천이야기
문학산미추홀 시작… 인천 2000년 역사를 간직하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8.09.13 17:18
  • 댓글 0
   
▲ 인천을 대표하는 산인 문학산. 인천 2000년 역사가 이 곳에서 시작됐다.

인근은 개항전까지 인천 중심지… 인천도호부 산성 등 유적지

지난 50여년간 군사지역이었다가 2015년 개방돼 시민 품으로

인천 문학경기장 인근에 있는 문학산(文鶴山)은 인천을 대표하는 산이다.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2000여  년전 인천의 첫 출발지가 문학산이었다. 최근 문학산 정상에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이 들어섰다. 지난 주말에는 매년 한 차례씩 인천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가 열렸다. 오랫동안 인천의 중심지였지만 군사지역에 묶여 몇 년 전까지 멀리서만 바라봤던 문학산이 이제는 개방돼 인천시민들의 친구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천 역사의 발상지

문학산은 인천시 미추홀구의 문학동 · 관교동 · 학익동과 연수구 연수동 · 청학동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 높이는 217m다. 문학산은 인천 역사의 발상지이면서 2000년 인천이 역사를 품고 있다. 신라의 문학산성, 고려시대의 문학사지, 조선 전기에 지어진 인천향교와 인천부청사가 자리한 곳이다. 이 밖에도 학산서원지와 안관단지 등이 위치해 있다. 백제 이전 미추홀 왕국이 처음 문학산 일대에 자리잡았다. 인천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문학산 일대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기 전까지는 인천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인천시청격인 인천도호부가 있었다. 문학산은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약 50여 년간 군부대가 산 정상에 자리 잡으면서 군 시설물 설치로 지형이 많이 변했다. 1980년대에는 산사태로 문학산성의 성벽이 상당 구간 유실되면서 성 안팎이 훼손되었다. 문학산의 북쪽사면은 제2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원형이 훼손되었으며 문학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이 일대의 구릉들도 삭평된 상태이다.

1990년대 이후 문학산 일대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나마 잔존해 있는 유적들을 확인하고 그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재구성 할 수 있었다. 문학산 일대에서는 구석기시대 석기가 지표에서 수습된 바 있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물론 역사시대 유적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문학동, 수산동, 구월동 유적 등은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대표적인 유적으로서 문학산 일대의 문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학산은 지난 50여 년간 군 부대 주둔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됐다. 1959년 미군기지화 작업으로 문학산 입산이 통제되다 지난 2015년 군사시설 이전으로 일반에게 개방이 되기 시작했다.

◆남산 배꼽산으로 불려

문학산은 학산(鶴山) 또는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엔 배꼽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산봉우리가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배꼽 모양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옛날 산 형태를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 문학산으로 통칭되고 있다. 문학산 북쪽에는 북망산(122m)이 위치하며 그 주변의 낮은 산지들이 동서 방향으로 완만한 능선을 이루면서 길게 뻗어있는 반면 남북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주봉인 문학산을 중심으로 동서 2.5㎞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북으로 산줄기가 뻗어 가다가 다시 좌우로 갈라져 서쪽으로는 용현동으로, 동으로는 인천도호부 청사와 인천 향교 뒤를 감싸고 승기천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도 산줄기가 이어져 청량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1782년(중종 6)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숙종 임오년(1702)에 학산 서원을 세우고 무자년(1708년)에 사액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남산’이 ‘학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증보문헌비고'에 문학산성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미추홀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으로 현재 인천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 하여 남산이라고 하고,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또 산 위에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비류왕이 도읍한 곳이라고도 하며 왕이 분개하여 죽은 까닭에 분성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문학산성은 이중으로 된 성으로서 외성은 석성으로 주위가 약 200m이고, 내성은 토성으로 주위가 약 100m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동북면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는 조선 시대에 만든 높이 3m 의 고분형의 봉수대가 있어 마치 배꼽처럼 보여 문학산을 ‘배꼽산’ 또는 ‘봉화둑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봉수를 허물어 버려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두 기자  ld@1gan.co.kr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천이야기면 다른기사 보기
이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오늘의 주요뉴스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