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친정으로 대일외교진 교체… 전통 교린 외교 고수

초지대교

조선 26대왕 고종이 친정 체제를 갖춘 1874년 조선과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 공식적으로 외교적 접촉을 갖는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조선의 일본의 외교는 대마도라는 중개인을 통해 이뤄져왔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며 조선과 직접 외교를 시도했다. 6~7년간 갈등 기간을 거친 뒤 고종은 유연한 자세를 갖고 일본과 협상에 임한다. 조선은 일본의 문서에 일본 왕을 황제로 칭하는 등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서계 내용을 일부 수정하면 교섭을 갖겠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협의 때는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결국 1875년 일본은 조선에 군함을 보내 무력 행사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운요오호 사건을 일으킨다.

◆고종 대일외교 라인의 변화

1873년말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찾아 친정 체제를 갖춘다.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도 외교적 변화가 크게 일어나고 있으니 바깥 사정을 알아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 등은 역관을 파견해 일본의 사정을 알아봐야 한다고 고종에게 의견을 제시한다. 고종은 무조건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 일본과 접촉을 시도한다. 가장 먼저 강력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파 관료들을 교체한다. 1874년 2월 흥선대원군의 대일 외교를 일선에서 실무적으로 주도하던 동래훈도(訓導) 안동준을 위시해 부산첨사, 동래부사를 모두 바꾼다. 조선 조정은 2년전인 1872년 초량왜관에서 일본인 수십명이 무법으로 난출한 책임을 물어 안동준과 동래부사 정현덕을 귀양보내고 경상감사 김세호를 파면시켰다. 고종은 오랫동안 승지로 근무한 자신의 측근인 박정양을 경상도 암행어사로 임명해 경상도 일대 상황과 특히 부산 초량왜관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소상히 알아보게 한다.

1874년 일본은 조선의 권력에 변화가 있고 외교 라인이 바뀌었음을 알고 조선의 사정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고 조선 정세를 정찰하고,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외교적 술책을 부리던 대마도인들을 조치한다. 그러나 만일 조선이 응하지 않으면 외교 사절을 파견할 때 전투력을 갖춘 군함 여러 척을 보내 일본의 위세를 보여주기로 방향을 정한다.

일본은 쇄국을 고수하던 대원군파의 실각과 동래부사 부산훈도 등 실무적인 외교 라인의 교체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대를 부풀린다. 일본 신문에는 조선이 개항할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의 실정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조선 일본 공식 외교 접촉

1874년 6월 일본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초량왜관에 도착했다. 그는 외형상 외무성 소속의 외교관이었지만 사실상 첩자 노릇도 했다. 일본과 실무적 접촉을 할 동래훈도 현석운은 초량왜관을 찾아 모리야마와 회담을 가졌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 관리와 일본 관리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오랜동안 조선은 일본의 외교 창구는 오직 대마도주뿐이라고 주장하며 외무성이 파견한 외교관들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현석운이 공식적으로 일본관리 모리야마를 만나 회담했다. 당시로서는 조선과 일본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회담이었다.

모리야마는 현석운에게 일본 외교 문서에서 문제가 됐던 천황·천자·칙서 같은 표현을 바꿀 것을 고려하고 있으며 수정된 국서를 보낼 테니 받아줄 것과 조선이 먼저 일본에 사절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 현석운은 시간을 주면 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모리야마가 다시 가져온 국서에는 황(皇)·칙(勅) 이라는 용어가 고쳐지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의견은 양분됐다. 관행에 어긋나므로 접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과 관행에 관계없이 접수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고종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대세는 국서 접수 거부쪽으로 결론이 났다.

조선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던 모리야마는 직접 동래부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동래부사와의 만남도 무산됐다. 동래부사를 면담할 때, 모리야마는 양복을 입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동래부사는 전통에 따라 옛날 복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리야마는 거부했다. 모리야마는 옷을 입는 것은 당사국의 문제이지 조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강력 항의했다.

일본측은 훈도와 동래부사가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고 판단해 잠시 조선의 권력 구도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져 정부 노선이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다.

조선과의 교섭이 무산되자 조선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더 이상의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군함을 파견해 무력 도발을 일으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메이지 정부는 군함 두 척을 파견해 무력 도발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부산 초량왜관, 200년간 일본 외교·무역의 거점

왜관은 조선 시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교역하기 위해 설치했던 장소이다. 부산 초량왜관은 1678년부터 1876년 근대 개항 때까지 20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외교·무역 거점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부산포 왜관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직후 절영도 왜관, 1607년 선조 40년에 두모포 왜관이 각각 설치됐다. 네 번째로 1678년 초량왜관이 설치돼 일본 사절과 관리, 상인 등이 거주하면서 외교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 동관은 상인들이 무역 등 경제활동 거점으로 이용했고 서관은 사절과 관리들이 외교의 장으로 사용했다.

전체 37만㎡(11만평) 규모로 둘레에 돌담으로 읍성을 쌓았다. 왜관에 사는 일본인은 담을 넘어 왜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초량왜관은 출입문인 설문(設門·부산역 상해거리)과 일본 사신이 조선 왕에게 예를 올리던 초량 객사(현 봉래초등학교), 통역관 집무소인 성신당(誠信堂), 땔감과 숯을 공급하던 시탄고(柴炭庫·현 백구당 자리) 등으로 이뤄졌다.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연향대청(宴享大廳·현 동광초등학교), 도자기 생산지인 부산요(釜山窯·현 고갈비 골목), 왜관 책임자 저택인 관수가(館守家) 등이 있었다.

부산시 관계자는 "초량왜관은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을 위해 한시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한 공간으로 평화 유지를 위한 곳"이라며 "이를 관광 자원화하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맞는 2025년까지 동남권 근·현대 역사문화 관광벨트 조성사업에도 초량왜관을 포함해 초량왜관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증강현실(AR) 프로그램 등을 개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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