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우리나라가 태풍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7년 이래 역대급 태풍이라던 19호 태풍 ‘솔릭’이 제주도에서 잠시 머물다가 얌전하게 동해상으로 빠져나갔다. 기왕이면 단비라도 넉넉하게 뿌려주고 갔더라면 고마웠을 텐데 너무했다. 한마디로 헛다리를 짚었다. 예전부터 기상청은 ‘오보청’이라는 그 말 헛말이 아닌 듯싶다. 20호 태풍 ‘시마론’에 이어 21호 태풍 ‘제비’ 이야기도 인터넷상에 간간이 떠오르지만, 늑대소년의 말처럼 들린다. 반시계방향으로 부는 태풍은 대부분 폭풍우를 동반해 물난리도 당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즘 세상처럼 희한하게 허풍으로 끝났다.

아는 형님 P 씨도 주차장으로 넘쳐 들어갈 빗물을 막기 위해 태풍이 온다는 날 새벽부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비상대기하고 있었단다. 그는 한때는 대기업에 나가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몇 해 전 명퇴하는 바람에 졸지에 백수가 됐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으나, 만만한 일자리가 없다. 눈높이를 아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새벽 4시 반에 기상해 첫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아파트로 출근한다. 난생처음 하는 일이지만, 시간 보내는 것 빼고는 그럭저럭 버틸만하단다. 이제 P 씨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24시간 맞교대 경비원이 됐다.

P 씨는 이른바 3D 업종(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주물공장에서 한평생 일했다. 그래서 퇴직 후 건설현장에서도 쉽게 일했단다. 물론 나이도 있고 날일 경험이 전혀 없으니 기공들을 보조하는 잡부였다. 신기한 것이 꾸준하게 나오는 일꾼들은 외국인뿐이더란다. 그래서 그런지 현장 반장은 대부분 중국인 조선족이 맡았다. 이른바 3D 업종이라는 물류창고, 이삿짐센터, 모텔 객실 청소, 요양병원, 찜질방 세탁실 등에는 방글라데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베트남, 몽골인들이 꽉 잡고 있다. 그들에게도 ILO(국제노동기구) 권고에 따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한다니 괜찮은 직장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다. P 씨의 두 아들은 공무원이란다. 큰아들은 타향인 H 시에서 근무하고, 작은아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S 시 시의원이 됐으니 공무원이나 다름없단다. 정권이 바뀌건 말건 미래가 보장된 공무원인 큰아들은 ‘늘공’이고 작은아들은 선거를 통해 어쩌다 공무원이 된 ‘어공’이 있다. 그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어공은 대부분 의욕이 넘친다. 임기 내에 반드시 업적을 남겨야 다음에 또 선출된다. 그러나 늘공인 큰아들은 여태까지 잘 됐는데 굳이 새로운 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하면 복지부동이 장수의 비결인데 괜히 나댈 이유가 없단다.

지난 주말에 P 씨와 시내 식당에서 한잔했다. 때마침 민주당 전당대회 개표가 진행 중이었다. 대통령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올바른 경제정책기조로 가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중·하층 소득자들의 소득을 높여야 한다. 이것이 혁신성장과 함께 포용적 성장을 위한 소득주도 성장과 공정경제가 더욱 다양한 정책수단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런데 “청년과 취약계층 일자리, 소득의 양극화 심화, 고령화 시대의 노후 빈곤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P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좋은 말일 테지만, 아무래도 뒤엣것부터 해결돼야 한다며 독한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민생경제 연석회의’를 가동하겠다던 이해찬 의원이 집권 중반기 민주당을 이끌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당을 만들겠다”고 했다. 엊그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정책실장이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지금의 경제정책을 정면 돌파하겠다고 다시 강조했다. 제발 역대급 허풍이 아님을 이참에 보여주시라.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끝났다. 그들의 눈물처럼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데 그건 내일 가봐야 알 것 같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