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으로써 다스리고 무로써 완전하게 한다.

이정랑 편집위원

‘문(文)’과 ‘무(武)’는 나라를 다스리는 커다란 두 개의 기둥으로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무공(武功)’은 ‘문치(文治)’에 의존한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해 쉽게 흔들리면 강한 무력을 보유할 수 없다. ‘문치’ 역시 ‘무공’에 의존한다. 통치를 유지하는 무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국가의 안정과 사직의 안전은 불가능하다. 이 둘은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촉진적이어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거나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공자(孔子)는 “문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를 갖추어야 하며, 무와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문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여 문무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했다. 공자가 ‘문치무공’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깊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잠시 국정을 주도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노나라는 사방 구석구석에 위기가 잠재해 있는 다사다난한 상황이었다. 공자는 문무를 아울러 강조하고, 예제를 중시하여 백성들에게 예의와 염치를 알도록 교육시켰다. 공자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주공(周公)의 덕을 펼쳐보였던 것이다. 동시에 기강을 세우고 내란을 평정하니 일순간 노나라에 중흥의 기운이 감돌았다.

기원전 500년, 공자는 노나라 정공(定公)과 제나라 경공(景公)을 대동하여 제와 노 국경 부근의 협곡산(夾谷山) 앞에서 회맹(會盟)을 거행하게 되었다. 노나라 정공은 사고방식이 단순해서 무사들로 하여금 신변을 보호하게 하는 사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자는 문무가 뗄 수 없는 관계라며 그 이치를 설명하고, 송(宋)나라 양공(襄公)이 무를 갖추는 데 소홀히 하다가 권력을 잃고 만 예를 들었다. 그러고는 좌우사마(左右司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수행하라고 했다.

회맹 장소에 이르러 공자는 제나라 군사가 주위에 많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곧 좌우사마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유사시 언제라도 전투에 임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고 명령하는 한편, 대부 자무환(玆無還)에게 수레 300승(乘-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나라의 크기를 말할 때 이 ‘승’을 기준으로 삼았다. 대체로 1천승의 나라면 대국에 속했다)과 병사를 이끌고 회맹지에서 10 리 떨어진 곳에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제나라 대부 이미(犂彌)는 제나라 경공에게 공자는 예법을 잘 알지만 용기가 없고 전투에 관해 문외한이라며 다음과 같이 권했다. 내일 회맹 때 300명가량의 래이(萊夷) 사람을 악단으로 가장시켜 저쪽이 방심한 틈을 타 군신을 사로잡고 수행원을 죽이면 노나라의 운명은 제나라의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다음날, 두 나라 군주와 재상, 네 사람이 제단에 올라 회맹식을 거행했다. 제나라 경공은 악단으로 변장한 래이족 300명에게 본토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했다. 순간 노나라 정공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공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먼저 제나라 왕에게 이적(夷狄)의 음악을 거두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제나라 경공도 도리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래이족을 물러가게 했다. 이어서 공자는 경공에게 노나라 군신들에 모욕을 준 지휘자들을 법에 따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경공은 거절했다. 공자는 화가 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며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두 나라가 형제의 관계로 우호를 맺는다면, 노나라의 집법관이 제나라의 집법관 노릇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자는 옷소매를 치켜 올리며 좌우사마를 큰 소리로 불렀다. 좌우사마가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달려왔고, 공자의 명에 따라 남녀 악단에서 지휘자 한 명씩을 골라 목을 베어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겁이 나 벌벌 떨며 꼼짝하지 못했다. 제나라 경공도 아연실색할 수박에 없었다. 그제야 노나라 정공은 몸을 일으켜 제단을 내려왔다.

회맹은 개운치 않게 무산되었고, 제나라 경공은 어리석은 꾀로 일을 그르친 대부 이미를 문책했다. 제나라 쪽에서는 양국의 모순을 완화하고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안영(晏嬰)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공 때 빼앗았던 노나라 영토를 되돌려주었다.

한비자(韓非子)의 내저설(內儲說)에는 공자가 ‘문치무공’의 정책을 펼침으로써 모든 일이 빠짐없이 잘 시행되어 노나라의 국력이 날로 강해지자, 상대국인 제나라 경공이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16명의 미녀를 노나라 애공(哀公)에게 보내 여색에 홀려 국정을 돌보지 못하도록 잔꾀를 부렸다. 공자는 간절하게 충고했으나 애공은 듣지 않았고,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버렸다.

‘문치무공’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현상은 역사상 전성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치무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정책이라는 것은 대다수 국가들이 인식하고 있다. ‘문’ 없이는 나라를 다스리기 부족하고, ‘무’ 없이는 나라를 안전하게 만들 수 없다는 논리는 국민들 모두가 공감한다. 국제 정세가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완화되고 있다고 해도, 전쟁 발생의 요소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한 이 계략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문치무공은 우리 모두가 실행하고 노력해서 기필코 성취해야 할 당면한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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