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외교관 아메노모리 ‘성신교린 정신’ 오늘날 절실

대마도 외교관 아메노모리 효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이 새겨진 비석.

최근 대마도를 다녀왔다. 대마도에는 조선과 뗄수 없는 인물들의 귀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조선말 의병운동을 하다 일본에 붙잡혀 유배돼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은 지난 회에 소개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 불운한 생을 살았던 덕혜옹주(1912~1989)도 있다. 일본인으로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이웃 나라인 조선과 일본은 믿음으로 교류)을 주창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국교 정상화에 앞장선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1568~1615)가 있다. 아메노모리가 생전에 주장한 ‘성신교린’은 비석에 새겨져 대마도 박물관 인근에 놓여있어 한국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300년전 조선-일본 성신교린 주창

대마도에는 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다. 쓰시마는 대마도의 일본식 표현이다. 지난달 말에 가보니 새롭게 리모델링 중이어서 주변은 공사 중이고 문은 닫혀 있었다. 자료관 인근에 크기가 가로 세로 1.5m 정도의 비석 하나가 공사장 인근에 서 있었다. 앞에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심을 다해 믿음으로 이웃으로 교류한다'라는 의미다. 이는 대마도의 관리이자 외교관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가 조선과 일본은 진심으로 믿음으로 교류해야 한다며 내세웠던 말이다.

지금도 한일관계가 악화되거나 문제가 꼬였을 경우 한일 양측에서 아메노모리의 성신외교 정신을 닮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학계나 문화예술계의 민간 외교 인사들의 입에서는 자주 아메노모리의 성신교린이 인용된다. 그는 한일 역사에서 한국과 일본 화해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현직으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일본 궁중 만찬 연설에서 아메노모리를 인용하여 한일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는 대마도의 외교관으로 부산에 머물면서 조선을 많이 알고자 했고 조선과 일본의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1711년과 1719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정성스럽게 응접했다. 그는 조선통신사를 만나면서 조선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는 데 앞장섰다. 국서 형식과 사절단의 방문지를 놓고 조선과 일본이 갈등할 때 해결하려 했다. 아메노모리는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조선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이즈하라에서 아메노모리의 묘가 있다는 표지석을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이즈하라의 소도시는 크지 않아 걸어서 모든 걸 구경할 수 있다. 도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산을 찾아 30여분 정도 걸어 정상에 도착했다. 산을 올라가는 데 대나무가 무성했다. 한국 사람들이 종종 찾아오는 지 한글로 ‘아메노모리의 묘’라는 표지가 화살표와 함께 곳곳에 있었다. 산 정상에 그를 비롯한 그의 가족의 묘가 있었다. 그는 과연 자신이 죽은지 100년이 조금 넘게 지난 후 일본이 조선에게 강제 조약을 요구했으며, 이후 조선을 강제로 빼앗아 36년간이나 무력으로 점령해 지배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 한글과 중국어에도 능통

아메노모리 사진이 들어간 대마도의 조선통신사 재현 행사 홍보물

아메노모리는 1668년 태어났다. 부친이 의사로 쿄토에서 개업해 오랫동안 교토 사람으로 알려져왔다. 어려서 총명하여 여덟살에 시를 짓기도 했다. 부친이 의사여서 어려서 의술을 배웠지만 '글공부를 하는 자는 종이를 버리고, 의학을 배우는 사람을 사람을 버린다'는 말을 듣고 고민하다가 의사를 단념하였다고 한다.

이후 학문에 뜻을 두고 유학자의 길을 걷는다. 1685년 에도로 나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스승인 기노시타 쥰안은 교토 출신으로 조선통신사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던 주자학자였다. 스승의 주선으로 쓰시마에서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35세때인 1702년 쓰시마의 파견 사절이 되어 처음으로 부산에 왔다. 그는 실제로 조선에 가보니 조선의 정세가 듣던 것과 달라 쓰시마는 새로운 교린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03년 본격적으로 조선어를 공부하기 위해 부산에 유학했으며 1705년 11월까지 조선에 체류했다. 1729년 초량 왜관에 조선 측과 교섭을 담당하는 실무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했다. 이 시기 동래부 역관으로 부임한 현덕윤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왜관에서 공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아메노모리 효슈는 이후 1748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를 만났던 조선인들의 평가는 흥미롭다. 1711년 조선통신사행의 정사였던 조태억을 비롯한 많은 통신사 일행들이 호슈와의 우정을 기린 시를 남겼다. 그들은 호슈를 문단의 종장, 일본 제일의 영재로 평가했다. 조선통신사 일원이었던 신유한은 사행록인 ‘해유록(海游錄)’에 호슈를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에는 호슈를 사나운 성질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으나 점차 마음을 열어 사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슈는 걸출한 인물이며, 3개 국어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일본 최고의 인물이다. 호슈의 세 아들도 같이 만났는데, 아들들의 품성이 대단하며 자식 복이 있으니 가문의 축복이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라”

아메노모리의 묘.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과 교류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교린제성’‘조선풍속고(朝鮮風俗考)’‘교린시말물어(交隣始末物語)’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논한 ‘교린제성’과 조선어 교과서 ‘교린수지’를 출간하였다. 교린수지는 조선어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 지리 풍속을 공부해 적은 통역 학습서다. 조선의 각 항목을 60여 개로 분류해 조선어와 일본어로 병기했다.

1728년 저술된 교린제성은 호슈의 외교 방침인 성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외교 지침서다. 성신이란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실하게 교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책에서 일본과 조선은 서로 풍속이 다르고 기호도 다르기 때문에, 일본인의 습관으로 조선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 일본인의 입에는 일본 술이 맛있고, 조선인에게는 조선 술이 가장 맛있다고 했다.

조선풍속고에서는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조선의 풍속을 논했으며, 교린시말물어는 조선과 교린정책에 대한 역사적 경위를 적었다. 그는 관직에서 사임하고 은거를 시작했을 때도 조선어학교를 지어 많은 조선어 통역을 양성했다.

그 밖에 저서로 ‘을유잡록(乙酉雜錄)’ ‘유년공부(酉年工夫)’ ‘상화록(常話錄)’ ‘권징고사언해(勸懲故事諺解)’ 등이 있다. 상당수 조선이나 조선어에 관한 책들이다.

그는 만년에 중국어를 배우는 어려움에 술회한 뒤 조선어 학습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3년여를 공부하니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어를 배우기 쉬운 것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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