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용왕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라는 그 자리에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별주부 전설 이야기가 있다. 바다의 용왕님이 병이 났다. 토끼의 간이 특효약이라는데, 용궁의 대신들은 서로 미루기만 할 뿐, 아무도 육지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때, 별주부 벼슬을 하던 자라가 자원하여 육지로 올라와 토끼를 유혹해 용궁으로 데려왔다. 간을 내놓으라는 용왕 앞에서 속은 것을 눈치챈 토끼는 꾀를 낸다. “아이코! 제가 간을 떼어 씻어 말리다가 급히 오는 바람에 그만….” 이에 용왕은 토끼에게 냉큼 육지로 가서 간을 가져오라 했것다. 자라의 등에 타고 다시 육지로 올라온 토끼는 별주부에게, “세상에 간을 빼놓고 다니는 짐승이 있더냐?”면서 도망쳤다.

필자는 지난주에 태안반도의 남쪽 별주부마을, 청포대해수욕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5일 중 2박 3일을 보냈다. 이토록 푸른 바다를 중국은 황해라 부른다. 서해에서도 가장 푸른 바다라서 원청(元靑)이 이곳이다. 해변을 낀 작은 솔밭이 있고 펜션의 문을 열고 나가면 넓고 깨끗한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아침저녁으로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가면서 밀려오고 밀려가서 백사장은 단단하면서도 푹신하다. 이른 새벽부터 노란 조끼를 입은 어르신들이 해변을 돌면서 조그마한 이물질도 어김없이 줍고 있어 더욱 깨끗하다.

토끼를 등에 태운 자라 조각상이 있는 자라바위 너머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간다. 바다에 돌담을 쌓아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독살체험을 하기 위해서란다. 재수가 좋으면 큼직한 광어나 우럭도 맨손으로 잡는단다. 우리는 예약하지 못해서 그 앞에서 호미 하나로 조개만 캤다. 개펄을 무작정 긁으면 하얀 조개가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한두 시간 만에 한 양동이 가득 채웠다. 저녁에 바비큐 먹을 때 석쇠에 올려 구워 먹었다. 이따금 모래알이 씹히는 게 결정적인 흠이지만 짭조름하니 맛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바다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 6분, 뼈아픈 사건이 터졌다. 만리포해수욕장 앞바다에서 S 중공업 해상 크레인과 홍콩 유조선이 충돌했다. 그 바람에 유조선 기름탱크에 구멍이 뚫려 원유가 바다로 쏟아진 대형사고이다. 바다는 순식간에 시커먼 기름띠로 뒤덮였다. 물살이 세고 빨라 기름띠는 조류를 따라 점점 넓고 멀리 퍼졌다. 사상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물살이 센 곳이라서 초기 대처에 시간을 허비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름이 오일펜스를 넘는 바람에 그 피해는 더욱 커졌다.

이 사건으로 해수욕장, 어장, 양식장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맨붕 상태가 됐다.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해양생물도 생명을 잃었다. 정부는 피해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사고현장을 방문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와 추운 겨울임에도 비지땀을 흘렸다. 양동이에 기름을 퍼 나르고 갯바위 사이에 낀 기름은 물론 조약돌 하나까지 일일이 수작업으로 닦아내던 고마운 손들의 도움이 컸다. 눈에 보이는 기름이야 제거됐지만, 마음의 상처는 너무나 크고 깊었던 모양이다. 한 맺힌 태안 앞바다는 그래서 유난히 푸른빛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간을 빼놓고 왔다는 토끼의 말장난처럼 웃프다.

낼모레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지고 매미도 울음을 그친다는 처서(處暑)이다. 안희정 성폭력, 김경수 드루킹은 물론 조영남 대작까지 모두 무혐의 판결이다. 이에 대해 여당은 ‘없는 거북 등의 털을 벗겨 뜯듯이 없는 것을 애써 구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비유’한 귀배괄모(龜背刮毛)라는 고사성어까지 끄집어내면서 특검을 특검하겠다면서 역성까지 들어준다. 그동안 정권을 잡으면 재판도 거래했다는데 토끼의 간이건 거북이 털이건 못할 것도 없겠다. 올여름은 무더웠지만, 모기와 파리가 별로 없어 좋다 했더니만 그 틈에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간까지 뺐다 넣었다 하며 말장난이 심해졌다. 애먼 사람들만 죽어났던 지겨운 여름도 슬금슬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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