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팔부자거리’

팔부자거리에 있던 어물전(魚物廛)과 매달린 생선을 바라보는 고양이를 그린 벽화. (연합뉴스 제공)

분당과 일산 등 1기 신도시가 새로 생기던 1989년 당시 시민들이 느낀 놀라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 인구에 치솟는 집값으로 시름 하면서도 "논밖에 없는 곳에서 어찌 살아"라는 농담이 유행할 만큼, 전에 없던 도시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일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3년 뒤 도로가 생기고 관공서가 자리 잡고 고층 아파트가 첫 입주를 시작하자 시민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어느덧 '부촌'이란 이미지를 갖게 된 이들 신도시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몰린 시민들로 벼 이삭만큼 빽빽이 거리를 채워나갔고, 20여 년이 지난 이제는 굳이 '신도시'라고 명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 2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신도시 사업

그런데 이런 신도시 조성사업이 200여 년 전 조선시대 수원에서도 대대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축조 후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집집마다 부자가 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한다)'의 정신으로 세운 팔부자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 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000여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정조실록, 정조 18년 1월 15일)"

1789년 정조는 화산 아래에 있던 옛 수원의 읍치(邑治)와 백성들을 현재의 수원으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이어 수원의 경제를 발전시켜 부유한 도시로 육성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의 부자들에게 이자 없이 자금을 대출해 화성 성내에 점포를 차리게 해 주거나 전국의 인삼 상권과 갓 제조권을 허락했다.

당대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파격적인 혜택에 한성 부호와 전국 8도의 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이들이 한데 상권과 마을을 형성하면서 지금의 장안문에서부터 행궁 앞 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팔부자거리가 형성됐다.

이곳은 당시 한성 육의전과 팔부자거리 외에 상설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 조선 8도 부자들이 모인 팔부자집

팔부자집은 팔부자거리내 형성된 부촌을 일컫는다. 팔부자거리와 팔부자집이 조성된 사실은 실록을 통해 확인됐지만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학자별로 일부 의견이 갈린다.

다만 1897년 요셉 알릭스 신부가 천주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팔부자집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편지에는 "수원에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팔부자집인데 약 30칸입니다. 값은 5000 냥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후 요셉 신부가 팔부자집을 구매한 뒤에는 "조선 왕국의 8도를 대표하는 최고 부자 8명이 똑같은 설계로 나란히 8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팔부자집'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본인이 산 집은 그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제일 잘 보존된 것입니다"라고 재차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의 내용과 당시의 주택 소유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팔부자집은 화홍문 아래로 수원천을 따라 가장 넓은 거리가 형성된 길목에 연달아 서 있던 기와집들을 말한다.

당시 어느 가문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각 주택의 규모는 적게는 111평부터 많게는 322평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됐다.

이들 팔부자집 주변으로 비단을 파는 입색전(立色廛), 해산물을 팔던 어물전(魚物廛), 소금을 파는 염전(鹽廛), 유기 등을 파는 유철전(鍮鐵廛) 등이 형성된 점을 미뤄 이들 팔부자들은 재력을 토대로 일대 상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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