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만주와 연해주서 항일 무장 활동

11일 준공식을 갖는 고양독립운동 기념탑

8월 15일 또 다시 광복절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목숨을 던지며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위인들을 잊지말아야 한다. 경기도 고양 출신인 이범윤(李範允·1856~ 1940) 선생도 그 중 한 분이다. 전쟁기념관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이범윤 선생을 2018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고양 출신 이범윤

이범윤은 1856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부대신 및 주러공사 등을 지낸 이범진(李範晉)이 그의 형이다. 선생의 가문은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고, 선대(先代)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 많았다.

조선 후기 삼정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많은 한국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농경을 시작했다. 조선과 중국 사이에 간도 귀속문제가 일어났다. 1882년 청나라는 임오군란에 개입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 뒤, 간도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세금 징수와 호적 정리를 시행하고 귀화를 강요했다. 변발과 편복(便服) 등 청나라 풍속을 강요하며 따르지 않는 한국인들을 추방하기도 하였다.

한국 정부는 간도 한인들에 대한 행정, 보호 기관으로 1901년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한 뒤, 이듬해 5월 22일 이범윤을 간도시찰로 임명한다. 이범윤은 한인 동포들을 위로하고, 인구와 호구를 조사하면서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여러 혜택을 주어 신망을 얻었다. 한인 동포들에 대한 청나라 관리와 토호들의 포학과 마적들의 약탈 행위를 목격한 선생은 교민보호관의 설치와 보호병의 파견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03년 8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전담케 하였다.

간도관리사에 임명된 이범윤은 산포수와 장정들로 사포대(私砲隊)라고 하는 1000여 명 규모의 충의대를 조직하여 한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간도 한인 동포사회에서 이범윤의 명성은 높아갔고, 후일 구국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자산이 됐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사포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일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1905년에는 연해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연추(煙秋, 노보키에프스크)를 활동 기지로 삼고 항일단체인 ‘창의회(彰義會)’를 결성, 이른바 연추의병부대(이범윤 의병부대)를 이끈다. 안중근 의사가 우영장(참모중장)으로 참여했다. 의병부대는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두만강 유역에서 수차례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는 진공작전을 전개해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이후로도 이범윤은 국내 의병 항쟁에 호응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항일노선을 견지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처단 의거가 일어났다. 이범윤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경술국치 때까지 불과 2~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등은 대규모 항일전을 펼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 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일본에 강제 병탄되고 말았다.

◆만주 노령 등서 불굴의 독립운동

1911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 총재로 추대되었다. 권업회는 최재형·최봉준이 부총재, 이상설이 의장, 홍범도가 경찰부장으로 구성된 전 노령(露領, 시베리아 일대) 최대 최고의 한인기관이었다. 권업회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한인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권업회가 운영한 대표적인 한인 교육기관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이다. 한민학교는 신한촌 건설 직후 설립된 계동학교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주의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권업회는 또한 경제력이나 민권 등 한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권업회는 1914년 9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3, 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범윤 6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북간도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군부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에 참여했다. 신민부 조직 당시 참의원장에 추대, 성동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관양성에도 힘썼다.

이후에도 만주,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하다가 1940년 10월 20일 노환으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난 2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유관단체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가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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