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연평도 포격… ‘한반도 화약고’ 확인

▲ 연평도 포격 당시의 처참한 장면.
▲ 연평도 포격 당시의 처참한 장면.

북 200발 포격으로 주민들 혼비백산, 육지서 피난 생활

최근 남북화해 분위기로 공동 어업 등 평화 기대  ‘솔솔’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쯤 북한이 연평도를 향해 수백발의 포를 발사했다. 포가 날아오는 장면은 방송으로 생중계되듯 그대로 보여줬다. 주민들은 혼비백산했으며 여기저기서 불길이 일었다. 국민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서해가 ‘한반도의 화약고’임를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남북간의 긴장 고조는 최고조에 달했다. 8년이 지난 지금 남북이 다시 화해하며 만나고 있다. 연평도 주민들은 서해 앞바다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1시간 가량 170발 포 떨어져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은 76.2mm 평사포, 122mm 대구경 포, 130mm 대구경 포 등을 이용해 연평도 군부대 및 인근 민가를 향해 개머리 해안부근 해안포기지로부터 무차별 포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막 훈련을 마친 해병대 군인들은 "빨리 피해"라는 고함 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대피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민들은 공중으로 날아가는 포를 직접 봐야 했으며 옆에 떨어지는 포탄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연평면사무소 직원들도 상당수 피신했으며 일부 공무원들은 인천시와 옹진군에 상황 보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TV화면으로 생중계되듯 비춰진 연평도 상황은 전시나 다름없었다.

포격 1시간이 지난 오후 3시 40분쯤 북한의 공격이 중단됐다. 북측에서 모두 170여 발이 연평도 쪽으로 날아왔다. 백령도 부근 조선인민군 해안포 기지의 해안포 입구도 개방이 확인됐으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병대원들은 북한군의 포격이 있자 K9 자주포들을 대피시설로 일단 숨기고 나머지 해병들도 대피호로 대피했다. 북한의 1차 포격이 잠잠해지자 K9를 다시 이동시켜서 첫 피격이 있은지 13분 후인 14시 47분경부터 대응 포격을 시작했다. 북측의 무도 포진지쪽에 50발, 개머리 포진지쪽에 30발 등 총 80여발을 발사했다. 공군은 14시 38분에 KF-16 2대를 긴급 출격했으며 추가로 KF-16 2대와 F-15K 4대를 출격시켰다.

포격은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이 전사하는 등 군인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해병대 서정우 하사는 휴가를 가기 위해 부두에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북의 포 공격이 시작되자 휴가 인솔 부사관의 복귀명령에 따라 차량을 타고 가다가 다른 동료 2명과 내려서 인근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다 방공호를 300여m  가량 남겨 놓고 인근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숨졌다. 문광욱 일병은 대피호에 있던 중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주변에 터진 포탄 파편에 가슴을 관통당해 숨졌다.

◆“전쟁 일어나나” 공포감

연평도 포격으로 연평 주민들은 엄청난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다.

하루 아침에 생활터전을 잃은 연평도 주민들은 육지로 나와 오랫동안 피난 생활을 해야 했고, 연평도에는 사실상 군인들만 남게 되었다. 인천이나 수도권 일대 거주지를 찾지 못한 연평도 주민들은 머무를 곳이 없어 독지가가 제공한 찜질방 등에서 생활해야 했다.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위치한 찜질방 ‘인스파월드’는 연평도 피난민들을 위하여 시설과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연평도, 백령도, 대청도 등의 서해 5도 초, 중, 고등학교를 무기한 휴교 조치했다. 피란나온 연평도 지역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학생 143명 가운데 거주지를 정한 121명을 인천과 경기 지역의 각 학교에 배치했다. 2012년 4월에 500여 명이 피난할수 있는 1호 대피소가 건립되었고 앞으로 연평도 전 인구가 대피하여 생활할수 있는 대피소 시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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