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우리나라 정치는 한(恨)부터 풀어야 직성이 풀린다. 문재인 정부도 경제나 민생은 잠시 미뤄놓았다. 적폐청산이건 뭐건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제대로 풀어낸 혹은 풀린 게 없다. 말을 바꾸면 좋은 세월만 허송한 셈이다. 마치 해방 직후 반민특위처럼 험악한 분위기다. 완장을 차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죽창까지 들면 뭐든지 찔러 죽일 태세다. 물론 집권자가 바뀌면 모든 걸 그들 위주로 생각하고 바꾸려 한다. 전임자가 추진했던 정책은 무조건 냄새도 안 나게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속이 후련한 모양이다. 지금 새로 출발하는 이 길이 정도(正道)이고 전임자 걸었던 길은 무조건 적폐로 몰아붙인다. 수신(修身)이나 제가(齊家)도 엉망이면서 치국(治國)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니, 평천하(平天下)는 아예 물 건너간 듯하다.

대통령선거뿐만 아니라 6·13 지방선거에서도 확실하게 밀어줬는데도 민생을 챙기는 추진력은 1도 없거나 지지부진이다. 국회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이다. 사용 내용조차 밝힐 필요 없는 특활비까지 목돈으로 척척 챙겨주는데 제 살 깎아 먹으면서 특별하게 활동할 필요가 없다는 투다. 한국당 씹던 입들이 이제는 제 식구인 민주당도 개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댄다. 최고급 최첨단 이기주의자들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 세상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이익과 관계되는 일에는 내남없이 ‘내 밭에만 물을 대면 된다’는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돌변한 세상이다. 고생 끝에 낙(樂)이 왔는데 잘 먹던 거 게워내자니 미련도 많고 아까울 거다. 공짜는 뭐든지 좋아하는 민족이다. 옛날에는 공짜는 양잿물도 큰 거로 먹었다고 하지 않던가.

벌써 입추(立秋)가 왔다. 이번 여름에 제대로 본 꽃이라곤 능소화, 배롱나무꽃뿐이다. 성급한 고추잠자리 몇 마리 허공을 날아다닌다. 콩국수로 점심을 먹는데 둘째의 전화가 왔다. 동생은 지난해에 탄저병으로 고추 농사에 실패해 이번에는 들깨를 잔뜩 심었단다. 크게 손이 안 가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서 거저먹을 줄 알았단다. 그런데 너무 가물어서 2000여 평 밭에 심었던 들깨가 거의 말라 죽어 망치게 생겼단다. 다행히 감자와 양파는 풍년이란다. 조금씩이나마 나눠 먹는 의미에서 택배로 부치겠단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짓는 농사이기 망정이지 전업 농부였다면 큰일 날 뻔했단다. 밭에 가서 잡초 한 포기 뽑아준 적 없는데 염치없다 했더니, ‘더위나 조심하라’면서 되레 우리를 걱정한다. 끗발도 없는 형인데도 잘 챙겨주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착하기만 한 내 동생이다. 절기상으로는 가을이지만, 바깥은 아직도 땡볕이다. 더위도 한철이다. 금방 지나간다.

톨스토이 우화 중에 애절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있다.

소와 사자가 있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다. 둘은 결혼했고,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참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소는 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자 역시 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와 사자는 점점 야위어 갔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다. 그 둘은 끝내 헤어지기로 했다. 헤어지는 이유는 똑같았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와 다름없는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이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만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것이 내 위주로 되지는 말아야 한다. 새롭게 뽑힌 자치단체장들이 취임한 지 두 달이 돼간다. 시민을 도민을 국민을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노라 맹세한 그들이 지금 뭣들하고 있는지 보라. 서로 헐뜯고 애써 감추려고 용을 쓰고 있다. 이런 깽판인 세상이라서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던 모양이다. 앞날이 캄캄하다. 이대로 이렇게 가다가는 쪽박 차게 생겼다. 그나저나 이번 전기세는 어떻게 감당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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