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하라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사찰 수선사에 최익현순국비

대마도에 있는 최익현순국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 27일 일본 대마도를 찾았다. 조선을 무력으로 짓밟는 일본에 강력 항거하다 대마도에서 세상을 떠난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과 조선통신사, 조선의 마지막 옹주였던 덕혜옹주(德惠翁主)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1873년 ‘대원군의 10년’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익현의 활약상은 지난 회에 소개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2시간 10분만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한국인으로 넘쳐나는 대마도

지난 27일 오전 9시 부산항을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항한 선박의 좌석 330여 석이 거의 다 찰 정도로 배 안에는 한국인들로 붐볐다. 단체 손님들과 낚시 관광객이 많았다. 대마도는 크게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있다. 부산에서 가까운 쪽이 히타카츠(比田勝·Hitakatsu) 먼 쪽이 이즈하라(嚴原·Izhara)다. 히타카츠는 부산에서 불과 50여 ㎞ 거리로 배로 1시간 10분 걸린다. 부산에서 대마도에서 가장 먼 곳인 이즈하라항까지는 2시간 10분정도 걸린다. 최익현의 순국비는 이즈하라에 있다.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20분이었다. 배에서 내리니 더운 바람이 훅 밀려왔다. 항구에서 걸어서 10여 분만에 최익현의 순국비가 있다는 절에 닿았다. 마을 골목을 찾아 들어간 절의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절의 이름은 수선사(修善寺)였다. 입구에 막아놓은 나무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살지 않은 듯 거미줄이 곳곳에 처져있었다. ‘이 곳은 종교 시설과 묘지가 있는 곳이므로 조용히 참배하시오’라는 한글 문구가 입구에 붙어 있었다. 주변이 묘지이고 온통 비석이었다. 기념비를 찾기 위해 사찰 옆과 뒷편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비석이 수백개나 됐다. 찌는 듯한 더위에 땀이 비오듯 해 포기하고 떠나려는 순간 절 입구 오른쪽에 활짝 핀 무궁화 수십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무궁화 중간에 ‘大韓國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대한국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라고 적힌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비의 높이는 2m가 조금 안돼 보였고 폭은 30㎝ 정도였다. 비 앞에는 조화가 놓여있었다. 비 옆의 바위에는 기념비 건립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면암 최익현선생은 대한제국의 유명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어려운 정세에서도 소신을 굴하지 않고 애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관헌에 의해 대마도로 호송되어 왔으며 적사에서 순국하셨다. 수선사 창건에는 백제 법승과 관계가 있다고 전해져 한국과 관계가 깊다. 선생이 순국한 후 대마도 유지들이 유례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깊은 곳에 순국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최익현순국비는 1986년 한국과 일본 인사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항일의병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1906년 대마도로 유배온 최익현은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을 했다. 불과 수개월만에 몸이 쇠약해졌고 결국 그해 12월 순국했다. 장례가 수선사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옮겨졌다. 부산에 많은 인파가 몰려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최익현의 장례가 치러진 사찰 수선사. 백제 승려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과 일본 중재자였던 대마도

대마도에는 연일 찾아오는 한국인들로 ‘관광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하루 2000여 명이 대마도를 찾고 떠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마도는 낚시인들에게 인기있는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출항날 같은 배를 탄 낚시꾼들이 줄잡아 50명은 넘어보였다. 깨끗한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고기의 싱싱함이 매력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마도 여러 식당에는 입에 들러붙는 싱싱한 회가 식탁에 올라왔다.

대마도에 전체는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들리고 곳곳에 안내문이 붙어있다. 부산과 함께 하는 국제마라톤대회도 개최한다는 홍보문도 눈에 띄었다.

대마도의 정확한 행정 명칭은 일본국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시(對馬市)다. 총면적은 709㎢로 강화도(면적 300여 ㎢)보다 2배이상 큰 섬이다. 주민은 3만 5000여 명이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길이가 약82㎞로 우리 나라에서 볼 때 길게 늘어져 있는 섬이다. 1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표적으로 히타카츠와 이즈하라에 사람이 몰려산다.

역사적으로 대마도와 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마도는 조선때부터 일본과 조선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조선과 관계를 맺어왔다. 때로는 왜구나 해적으로 돌변하기도 해 조선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후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의 중재자 역할에 적극적이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활약으로 조선과 일본은 다시 화해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조선통신사의 길이 열렸다. 임란이후 조선통신사는 일본은 대마도의 안내를 받으며 열 두 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다. 마지막 방문인 1811년에만 대마도에 머물렀다. 이때 전후로 조선과 일본의 틈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마도 중심도로 곳곳에는 조선통신사가 지나던 길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세웠던 ‘고려문(高麗門)’이 있고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소였던 국분사(國分寺)의 시설도 일부 남아있다.

부산과 가까운 곳인 히타카츠에는 한국전망대와 조선국역관사순난비가 있다. 전망대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부산이 보인다고 한다. 1703년 대마도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조선 역관 108명을 태운 배가 건너오다 기상악화로 좌초돼 모두 목숨을 잃는다.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기 위해 순난비가 세워졌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