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완 편집위원

누구나 어린시절에 자주 뛰어 놀던 곳의 추억을 한 두군데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3리길을 달려가 뛰어놀던 곳이 있다, 그중 한군데가 진위천이다, 당시에 하북냇가라고 하고, 조선시대까지 장호천이라고 불렸다. 그곳에 가서 수영하고 놀고 진위향교을 들러 보곤 했다. 진위향교에서 해질녁 무렵에 진위천 노을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절경이다, 진위천과 진위향교가 있는 곳이 진위현(振威縣)이다. 행정구역으로 지금은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이다, 진위현(振威縣)은 천년 동안 이어온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고을이다.

진위천 주변은 K-55미군공군비행장 활주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65년동안 소음과 공해로 인한 피해, 그리고 항공법 고도제한이 저촉되고 절대농지로 인한 개발행위 규제 때문에 개발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리적, 지형적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진위현(振威縣)의 역사 속을 살펴보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많이 있다. 

어사 박문수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속에서 우리 곁을 친밀하게 다가오는 인물중 한사람이다,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질문한다. “어사 박문수는 어디서 태어난지 아세요?”라고.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한번 필자를 쳐다보면서 '천안'을 이야기 하곤한다, 천안에 어사 박문수의 생가터가 있고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사 박문수는 진위현 관아 근처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이뿐만 아니다. 평택을 안고 있는 듯 봉황새가 춤을 춘다는 진위현의 주봉 무봉산(舞鳳山)아 있다. 우리는 지역의 영산이라고도 한다, 무봉산에서 바라보이는 동에서 서해로 흘러가는 귀천(龜川)이다. 귀천(龜川)은 아름답고 긴 내천 일명 장호천(長好川)이라고도 불러지고 지금은 진위천이다, 용인시에 위치한 부아산과 시궁산의 시긍샘이 발원지이며 어비리(이동)저수지와 이어져 무봉산에서 내려오는 도량냇가와 합류하여 진위천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1970년초 진위지역에 홍수피해와 산사태로 무봉산에서 내려오는 도량(샘물)냇가가 사라졌다. 그뿐인가, 조선시대의 검은소 타고 다니는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공당 이야기 본고지가 오룡동마을도 진위에 있고, 오성과한음의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이항복 후손 경주이씨 집성촌이 300년 넘게 세거지가 있는 곳도 진위(振威)이다.

경기도가 경기 지명이 생겼는지 1000년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럼 진위(振威) 지명은 언제 생겨났을까? 본래 백제(또는 고구려) 송촌활달인데, 후에 부산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진위현으로 개칭했다, 지금이 2018년이니까 1260년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수성군(수원)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에 경기도 지명이 이때 생긴것이고 수주(수원)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후에 현령을 파견함으로써 독립했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진위현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어, 경기도 남쪽 끝에 위치하게 되었다. 1433년(세종 15)에는 수원의 속현이었던 영신현이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군이 되어 공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속했다. 1907년의 월경지 정리 때 수원의 두입지인 오타면, 양성의 두입지인 소고니면이 진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수원군의 15개면과 충청남도 평택군 일원을 진위군으로 병합하여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즉 진위군의 군내면·일북면·이북면·마산면이 북면으로, 이서면·일서면·이탄면이 서탄면으로, 일탄면·송장면·여방면이 송탄면으로, 고두면·종덕면이 고덕면으로, 성남면·병파면이 병남면으로, 수원군의 토진면·수북면·청룡면·감미면·율북면이 청북면으로, 포내면·현승면·승량면이 포승면으로, 안외면·광덕면·가사면·현암면이 현덕면으로, 숙성면·언북면·오정면이 오성면으로, 평택군의 읍내면·동면·북면·서면이 부용면으로, 군서면·군남면·경양면이 서면으로 통합되었다. 1926년에 병남면을 평택면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1938년에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함으로써 진위군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진위면이 명백을 지키고 있다.

이러면 평택의 뿌리는 진위가 아니되겠는가. 천년이 넘은 이곳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만기사가 있고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고 생원과 진사 나리를 300여 명이나 배출한 진위향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김구 선생이 “나라가 부국 할려면 문화가 있어야 한다, 문화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라는 말씀처럼 지역의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10년전에 기회되어 평택시장에게 100년된 진위초등학교 자리가 일제시대의 잔재이니 다른데로 옮기고 원래있던 진위동헌터를 복원하고 주변일대에 한옥집을 조성하여 천년동안 지켜온 마지막 고을을 복원사업하자고 제언했는데 추진하다가 후임으로 선출된 시장이 이를 무시하고 진위면사무소를 신축하고 그 자리에 '진위현청터' 표지석만 우뚝 커니 세워놓았다. 다시한번 제언해 본다. “진위동헌터를 복원하고, 진위에 있는 역사문화 진위향교, 삼봉정도전 기념관, 만기사 그리고 어사 박문수가 태어나 자라는 진위천, 판소리 춘향가에서 나오는 삼남대로가 있는 이곳을 배경으로 역사테마 스토리텔링 지역을 연계하여 지리적 지형 그대로 문화관광지 콘텐츠를 개발하여 우리에게서 잊혀져간 역사를 숨결이 숨쉬는 역사문화도시로 건설”하는 것이 어떠한가? 때 늦지 않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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