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230여년·… 제물진두 갑곳 진무영 등 순교지

▲ 강화대교 인근 갑곶순교성지.
▲ 강화대교 인근 갑곶순교성지.

1866년 천주교 신자 박해 수천명 희생 병인양요 불러

강화 출신 황사영은 백서 작성 천주교 탄압 알리다 순교

인천시가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인 이승훈의 묘가 있는 남동구 장수동 일대를 기념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인천은 우리 나라 천주교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천주교 전파가 활발했으며 선각자들도 여러 명이 있다. 이승훈 기념공원 건립을 계기로 인천과 천주교를 알아본다

 

◆인천 천주교 시작

인천에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784년경으로 추정한다. 이즈음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이 일반인들에게 세례를 시작했다. 첫 영세자인 이승훈(세레명 베드로)은 참수당하여 지금의 남동구 장수동(옛 반주골)에 묻혔고, 그의 아들도 박해를 당한 후 이곳에 안장됐다.

인천에 천주교 공동체가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1830년대 들어서다. 인천에서 초기 천주교 선교는 순교의 역사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그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갑곶순교성지’다. 강화도 갑곶 해안은 조선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경유지였다. 땅끝 조선에 눈을 뜬 천주교 성직자들이 1850년 대 강화도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천주 복음이 전국으로 전파된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함대는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조선 정부의 책임을 물어 갑곶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다. 이후 프랑스군은 후퇴했지만 이로 인해 강화에서는 ‘병인박해’가 시작된다. 갑곶돈대에서 보이는 바다 건너편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 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도에는 갑곳순교성지 말고 천주교인이 희생된 진무영 성지가 또 있다.

인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 인근에 있는 제물진두(祭物津頭) 순교터는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곳이다. 파라다이스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 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로 여겨진다.

◆천주교 탄압 불붙인 황사영 백서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1775∼1801) 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했다.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전해들은 황사영은 천주교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는다. .

1801년 전국에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긴다.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 청나라에 있는 외국 신부에게 전하려했다. 가로 38㎝, 세로 62㎝의 흰 명주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줄에 110여 자씩, 121행, 모두 1만 33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다. 그러나 밀서는 전달되지 못하고 황사영은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으로 참수된다.

1886년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한불수호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며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천주교는 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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