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인 처인구청 공원환경과장

경북 영천으로 향하던
정몽주의 상여 행렬
용인서 멈춰 유택 마련

내 아호는 벽창래
평북 지명서 따와
통일의 날 기다려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의 지명소개를 간략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 앞에 풍덕천이 있어서 풍덕천리라 하였다. 풍덕천은 원래 “내 천(川)”이기에 풍덕내라고 하였다. 풍덕내에 관해서는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만, ″풍덕에서 오신다″는 뜻으로 포은 정몽주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기연을 맺어준 지명이라고 한다. 즉 포은선생이 선죽교에서 피살된 뒤 경기도 풍덕군에 일시 매장되었다가 뒤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천묘하고자 하였다. 그 면례(緬禮) 행렬이 지금의 풍덕천동에 이르자 면례행렬 앞에 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 자리인 모현면 능원리에 떨어졌다. 남쪽으로 길을 떠나고자 하면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할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뜻이라 하여 발길을 돌리자 상여가 움직였고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선생의 유택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풍덕에서 오신다″고 풍덕래(豊德來)라고 한 것을 1914년 지명 표기 작업할 때 ′올 래(來)′자를 ′내 천(川)′자로 바꾸어 풍덕천(豐德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당초는 하천명칭과는 전혀 무관했던 풍덕천 명칭과정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감히 유명한 포은선생과 관련된 풍덕래(豐德來)라는 명칭에 착안하여 나의 아호(雅號)를 고조부님 고향과 연관지어 ″벽동·창성에서 왔다″라는 뜻의 벽창래(碧昌來)를 사용하고 있는데, 풍덕래만큼이나 의미가 서려있다.

필자의 고조부는 1812년 순조임금 시절에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묘소는 풍기의 소백산 자락에 있다. 출생·사망지역이 너무 떨어져 있고, 어려서부터 힘들게 벌초를 다니면서 항상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십승지(十勝地)를 알고서야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창성(昌城)군에 제비강(齊妃姜)씨의 집성촌이 있었는데, 인접한 벽동(碧潼)군과 함께 우직하게 일 잘한다는 벽창우(碧昌牛)의 산지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강씨 고집이 거론되는 것은 아마도 창성군의 우직한 소와 강씨 집성촌이 함께 있어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세도정치가 극심하던 그 시기에 고조부 출생 1년 전인 1811년 평안도 서북지역에서 홍경래 등의 농민반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후 평안도 서북지역에 대한 조정의 차별이 심화되고 민초들의 삶은 상당히 어려워 졌다. 저 유명한 김삿갓도 동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르신들을 따라 벌초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었다. 고조부님을 포함하여 15가족이 고향 창성을 떠난 지 달포 만에 소백산 자락에 들어와 정착하였다라고. 묘소가 소백산 자락이라 벌초산행도 아주 힘든데 이주해 온 이유를 도저히 알 길이 없었고, 어른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창성에서 풍기까지 직선거리로 어림잡아도 500여km이고, 오는 길에 평양, 개성, 서울, 수원 등 그 당시의 큰 도읍지나 살기 좋은 많은 고장을 거쳐 오면서 굳이 왜 오지인 소백산 자락으로 이주하였을까 하였다. 몇 년 전 풍수지리관련 고서적을 읽다가 십승지(十勝地)라는 대목을 보고 무릎을 쳤던 적이 있다. 십승지라 함은 난리가 나도 전란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만한 영월 동강지역 이남의 열 곳이라고 하며 그 중 고조부가 안착한 곳이 바로 십승지 중 한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유명한 풍기인견도 원래는 북한지방에서 시작되었는데 같이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고, 풍기인삼도 개성인삼을 그때부터 이주자들이 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가끔은 어른들이 윗대 할아버님들이 산에 다니셨다는 말씀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노장사상과 관련된 기도를 드린듯하다. 노장사상과 관련되는 십승지를 찾아 살기 어려워진 고향을 등지고 집단이주를 한 것이라는 추론이 어렵지 않았다.

그 때부터 필자는 풍수지리를 더욱 깊게 공부하게 되었다. 고조부의 십승지 이주가 아니었으면 우리 후손들은 지금 거의 북한 지역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항상 아찔하다. 지금도 팔촌형제들과 후손들에게 고조부의 선견지명에 고마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 때부터 나는 건배사를 오로지, 오늘의 나를 대한민국에 살게 해 주신, 고조부께 항상 감사드리고 고조부의 북한 고향을 꼭 찾아보겠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하여″만 일관되게 외쳐오고 있다. 내 아호도 벽창래(碧昌來)라 하여 ′벽동·창성에서 왔다′라는 의미를 담았다. 통일되든가 왕래가 되면 최우선적으로 달려갈 곳이기도 하다.

지난 4월말의 판문점 남북대화와 앞으로 있을 북미대화, 북중대화 등 한반도 비핵화관련 소식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관계국 정상들의 행보마다 초미의 관심거리다. 일정이나 사안이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겠지만, 바로 통일은 안 되더라도 서로의 고향방문이라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건배사를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하여″가 아닌 ″통일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라 할 날을 손꼽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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