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은 임진왜란 때 용맹한 무장이었다

원균 장군 묘.

지난 4월 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元均:1540~1597) 장군 유적지에서 원릉군(原陵君)기념관이 개관했다. 평택은 원균이 태어난 곳이며 묘지가 있다. 원릉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이 원균에게 내린 호이다. 원릉군기념관은 원균 장군의 가계와 출생, 무과급제,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공훈책록 등 원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전투선인 판옥선과 무기 등을 다양한 사료와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평택에서는 원균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용맹했던 원균 장군.(평택시청 홈페이지)

◆평택 도일동 출생

원균은 1540년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절도사로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7년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원균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셌다고 한다.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북쪽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다. 1592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고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요청에 응하지 않다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 모였고, 옥포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선을 공격하여 적선 26척을 격침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전쟁 중 원균은 특별한 방법으로 매번 적을 무찔렀다. ‘당파’라 하여 우리 군함으로 적선에 돌진하여 적의 배를 깨뜨렸다. 당시 왜적의 배는 삼나무, 아군의 배는 소나무로 되어있어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적의 조총·활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기에 보통의 용맹과 담력으로는 힘든 것이나 원균은 과감히 나갔다. 일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적병을 1개월간 전라도 해역에 진출 못하게한 것은 숫적 열세를 용맹으로 막은 것으로 평가된다.

1597년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을 때,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곧바로 부산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받고 적의 동정을 살폈는데, 조선군을 속이는 계략을 쓰고 있음을 알아내고, 조정에 공격이 적절하지 않음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하는 수 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두고 계속하여, 부산포로 공격하였으나 적들의 유인책에 말려 퇴각하려 했지만 적들의 배후 기습을 받았다.

원균은 이 전투에서 결국 붙잡혀 살해되었다. 적이 물러간 후 원균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묘소 자리에서 제사지냈고,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서 제문과 부의를 하사했다.

평택 원릉군기념관 개관식 원균에 대한 인식바뀐다

◆원균과 이순신, 선조

원균은 이순신과 달리 선조의 사랑을 받았다. 선조는 원균의 용맹성을 높이 사 육군의 장수에서 경상도 우수영의 수군절도사로 발령을 내고 나라의 방비를 맡겼다.

원균이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인 1576년으로, 이후 주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군대 생활을 했다. 관직 운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는데, 워낙 강직하여 상관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승진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며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된 것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유성룡이 그를 선조 임금에게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이순신보다 다섯 살 위인 원균은 이순신, 유성룡과 같이 어릴 적부터 동네 선후배였다는 설도 있다. 원균은 이순신 보다 일찍 무과에 합격하여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며 젊은 시절부터 무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여진족이 그의 이름만 듣고도 공격을 멈추었다고 하니, 원균 또한 매우 용맹한 장수였다.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칠천량해전도 원균 탓만은 아니었다. 원균 또한 여러번 일본군과 작은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원균이 머뭇거리자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이 원균을 불러 원균 부하들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곤장을 때려 치욕을 준다. 원균이 어쩔 수 없이 출정준비하다 칠천량에 정박 중 일본군 기습을 받고 대패하고 육지로 까지 쫒기다 왜병과 끝까지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한다.

원균과 이순신은 성격이나 행동이 다른 장수였다. 원균은 야전형 용맹무쌍한 돌격형 장수였다. 이순신은 신중하고 아주 치밀한 전략가였다. 원균을 때로 이순신이 너무 신중하고 치밀해 답답함을 느꼈고 이순신은 원균은 너무 무모해 보였다.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

임진왜란이 끝나고 3년 후 조정은 공신 책정을 시작하였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한음 이덕형, 오성 이항복, 오리 이원익을 포함한 여러 중신들이 회의를 거듭한 뒤, 전사하거나 생존하여 나라를 구한 충신에게 선무공신 1·2·3등 18인, 선무원종공신 1·2·3등 9056인, 호성공신 2,554인 등 1만여명에게 선조는 공신 교서를 내리고 포상하였다. 원균과 이순신 그리고 권율은 함께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이 되었다. 또한 원균에게는 관작을 높여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증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에 추봉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가묘에 예장하였다. 선조 36년(1603)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으로 추증되었다. 이듬해 5월 18일에 임금이 사신을 내어 가묘()에 제사지내게 하면서 치제문을 보냈다.

◆원균의 묘

평택에는 원균 유적지가 있다. 원균의 묘를 비롯해 사당과 선무공신교서 등이 있다. 그의 묘는 임금이 녹훈 봉작 교서와 제문을 내려 봉표(능의 터를 미리 정하여 흙을 모아 봉분을 만들고 세우는 표)치제(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도록 할 때 잘 조성되었다고 본다.

묘역 안에는 신도비 1개, 문인석 2기, 무인석 2개, 돌로 만든 석등이 1기, 묘비 2기가 서있고, 애마총이 묘 아래쪽에 있다. 또한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이 배치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쓴 비문에는 왕이 내린 교서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균 사당은 1991년 향토유적 6호로 지정됐다. 국가에서 사당을 세워 후손에게 제향하도록 하였던 듯하며, 본래의 건물은 경기도기념물 제 57호인 묘역 앞에 있었으나 사당에 물이 들고 낡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