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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이승훈한국 첫 천주교 신자… 1783년 최초 세례
  • 이두 기자
  • 승인 2018.05.1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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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역사공원 조감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 제물진두서 후손 6명 처형

인천 장수동에 묘지 있어,  인천시 역사공원 조성 추진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을 기리는 ‘이승훈 역사공원’이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 세워진다. 장수동에는 이승훈의 묘가 있다. 2022년까지 125억여원을 들여 4만5000여㎡의 면적으로 조성된다. 인천시와 가톨릭계가 오래전부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최근 구체적으로 확정됐다. 이승훈은 1783년 중국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한다.

◆우리 나라 최초 천주교 영세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이자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다. 서울 남대문밖 반석동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향리는 인천 샛골이었다.

  1780년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천주교를 접하게 됐다. 이벽(李蘗·1754∼1786)과 친교를 맺으면서 천주교를 알게 됐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다. 중국에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그라몽(Grammont·1736~1812)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길에 가톨릭 서적, 십자고상( 묵주, 상본 등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1785년 서울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스스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만든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조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1785년 적발돼 배교했다가 1787년 교회로 돌아와 자치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했다. 성직제도란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임시로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한 제도. 이승훈이 대주교가 되고, 권일신 ·유항검 등 10인을 사제(司祭)로 삼았다.

 한편 1789년 평택현감에 등용되었는데, 1790년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의 금지를 명한 베이징 주교의 말을 전하자 다시 배교했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돼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 세번째 배교한 뒤 풀려났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밀입국하자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한 혐의로 체포, 예산에 유배됐가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정약종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사형을 당했다. 1801년 45세 때다.

 그의 유해는 여종 이갑례에 의해 향리 인천의 샛골로 옮겨져 선영(현 만수 임대아파트 7, 8단지 일대)에 장사됐다. 이승훈 묘역은 지난 2011년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이승훈 후손들 인천에서 순교

인천에도 천주교 순교 터가 있다. 바로 제물진두이다. 위치는 인천 중구 항동의 파라다이스 호텔 인근이다. 오랫동안 문서상으로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오랫동안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천주교쪽에서는 제물진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 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 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고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을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 정권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楊花津頭, 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택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두(津頭)는 곧 나루터로서 외국 선박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군중들의 왕래가 잦은 이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을 함으로써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함께 천주교 금단(禁斷)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제물진두에서 이승훈의 후손을 비롯 여러 신도들이 처형됐다. 1868년 부평에 살던 세명의 신도가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 제물포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4월 20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인천 지역에서의 박해는 다시 신미양요(1871년)를 전후하여 세차게 일어났다. 1871년 5월 17일경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증손자이며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의 두 아들 이연구(李蓮龜, ?~1871), 이균구(李筠龜, 일명 筠鶴, ?~1871)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가 체포되어 미군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효수돼 순교하였다. 제물진두에서 이승훈의 후손 6명을 포함해 9명이 처형됐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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