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갈수록 놀라운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지난주 금요일, 남북 정상이 평화의 집에서 만났다. 김 위원장이 탑승한 벤츠 리무진을 밀착 경호하는 12명의 경호원이 차량 좌우와 뒤쪽을 에워싸고 V자로 밀착 경호하며 달리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체격, 불이라도 뿜어낼 듯한 그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전 9시 28분부터 오후 9시 27분까지 딱 하루의 절반을 머무는 동안 그들은 눈 한 번 껌벅하지 않았을 성싶다. 그래서 어릴 때의 꿈이기도 했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시절은 태권도가 유행했었다. 우리 마을에는 청도관 건넛마을에도 청도관이 있었다. 남자아이라면 대부분 태권도장에 나갔다. 처음에는 흰띠를 허리에 두르고 절도 있는 동작을 익힌 후 9급인 노란띠부터 8괘 1장 품새를 배운다. 초록, 파랑, 밤띠로 바뀌면서 마지막 품새인 태극 8장을 모두 외우면 1급이 되어 빨간띠를 받고 국기원 승단심사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서 빨간띠에서 오래 머물렀다. 사부님은 승품 심사에 나가는 형들의 대련(겨루기) 상대로 언제나 나를 내세웠다.

배움이 부족했던 아버지의 직업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었다. 비누장사, 생선장사, 연탄공장, 소장사 등을 전전하시다가 새마을 사업이 한창 무르익었던 때는 집 짓는 데 쓰는 벽돌을 찍으셨다. 힘이 좋으셔서 남들보다 훨씬 단단하게 많이 찍으셨던 거로 기억된다. 우리 형제들도 학교를 파하면 밀머리 공터로 곧장 달려가서 물을 뿌려주며 도왔다. 머리들이 굵어지니 먹거리로 들어가는 비용도 차츰 많아질 때였다. 어머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필자의 도시락만큼은 최고로 좋은 반찬으로 싸주셨다. 세상에서 젤 힘든 게 공부라면서 집안 걱정은 조금도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던 터였다. 하지만 나는 공부보다는 운동이 더 좋았다.

그때만 해도 내 체력은 아버지를 닮았다. 덩치만큼은 또래와 비교하면 훨씬 컸고 웬만한 상대는 내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대결 상대들에게 내리 패하기 시작했다. 나를 넘어서야 국기원으로 가기에 형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꿰차고 있었다. 나름대로 힘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피 터지는 맹연습도 했다. 식사 때마다 다친 손등을 가리려고 손수건을 두르고 젓가락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님께서는 이미 그 속내를 알고 계셨지만, 만약에 아버님이 공부를 안 하고 운동한다는 걸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다. 어떤 날은 작은 방에서 총각김치 하나로 국에 밥을 말아 혼자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고교 2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는 맥없이 쓰러지셨다. 그래서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공군 기술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어린 동생들을 위해 가장 아닌 가장이 돼야 했다. 1,095일, 36개월의 군 생활 중 틈틈이 취업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그 결과 제대 후 일주일 만에 대기업에 취업해 출근했다. 첫 작업이 쇳덩이를 녹여 거푸집에 붓는 주물 일이 내게 맡겨졌다. 다른 직종보다 두 배정도 높은 일당이라서 힘에 겹지만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잔업을 마치고 집에 와 잠만 자고 출근해 쇳물과 사는 그런 생활을 20여 년간 계속했었다.

동물학자 E. 마레이즈는 아프리카 개미들에게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는 개미집 둘레에 둥그렇게 홈을 파고 물을 대놓고 외부와 개미집을 차단했다. 물론 개미집에 있는 개미도 있었고 일부는 밖으로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나간 상태였다. 마레이즈는 물로 막아놓은 홈의 한 군데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집안에만 있던 개미는 밖에 나가려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위험부담을 안고 밖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개미들은 그 외나무다리 위를 건너 위험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개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선다. 두 정상처럼 자주 넘나들다 보면 길은 분명히 뚫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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