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봄비가 밤새도록 추적추적 내렸다. 출근길에 우산을 챙겨 쓰고 나왔지만 낡은 구두의 밑창으로 물기가 배어들어 양말이 축축해졌다. 사무실에 들어와 헌 신문지로 양말의 물기를 짜내고 창가에 널어놓고 밖을 보니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릴 것 같다. 정치꾼들도 오늘만큼은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무실 앞 도로변에 쌓여있는 쓰레기들도 풀이 죽어 납작해졌다. 어젯밤에 길바닥에 뿌려놓은 술집 홍보지와 비키니 아가씨 사진이 박힌 명함들도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우비를 걸치고 집게로 줍는 미화원 아저씨의 등골로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아름답던 목련, 벚꽃도 꽃잎 쓰레기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이젠 완연한 봄이다. 철쭉과 영산홍이 지고 6월이 오면 장미꽃이 만발할 차례다.

쓰레기만도 못한 갑이 을에게 횡포를 부렸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요즘 인구에 회자하는 가족 중심의 세습기업은 이른바 부모 잘 만난 덕에 왕자와 공주로 자란 금수저들이다. 부모의 자리를 대물림할 그들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아예 머슴 취급하는 것이야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땅콩 회항, 물벼락 갑질’ 외에 그 일가족이 다품종 세트로 묶여서 쉽게 진화되진 않을 성싶다. 총수가 직접 나서서 사과한다고 한들 씨알이 먹힐 리가 없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 그들에게는 웬만한 반칙은 허용되며 면죄부도 주어진다. 고질적인 세습 체제하에서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들은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기를 펴지 못하고 좌절한다. 을의 반란은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터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끼리 더불어 살아야 함에도 아무리 돌려봐도 공정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쓰레기’의 본뜻은 ‘쓸모없게 되어 버려야 될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하찮은 인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비슷한 말로 ‘찌꺼기’가 있는데 ‘쓸 만하거나 값어치가 있는 것을 골라낸 나머지’라는 뜻도 있으며,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이라는 ‘오물’도 같은 뜻이다. ‘허섭스레기’와 ‘허접쓰레기’라는 말도 있는데 ‘좋은 것이 빠지고 난 뒤에 남은 허름한 물건’ 즉 ‘볼품없다’는 말이다. 요즘 생활쓰레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생활쓰레기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그 해결 방안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쓰레기로 인한 재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엊그제 휴일에 어느 도시에서는 쓰레기 더미에서 옮겨붙은 불로 원룸에 살던 사람들이 참변을 당했다.

주거지와 일터에서 나오는 쓰레기 불법 투기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때 잘 되는 듯싶더니 어느 틈엔가 몰래 양심마저 버리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깨끗한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일이 아니건만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세계 폐기물의 절반가량을 수입해온 중국이 고철과 폐지, 폐섬유 등 재활용 폐기물 수입을 중단했다. 우리나라도 폐플라스틱과 폐비닐 그리고 폐유리 등 다량의 재활용 폐기물을 수출하고 또 수입했던 터였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무방비 상태에서 옴짝달싹 못 하며 쓰레기 더미에 깔리게 생겼다.

그 옛날 시골에서는 읍내로 오일장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 다녔다. 하루는 어느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저만치 앞을 보니 아랫동네에 사는 아주머니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농부는 달구지를 세우고 아주머니에게 마차에 타라고 권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머리의 짐을 내려놓지 않고 걸터앉았다. 내려놓고 편히 앉으라고 하니 아주머니 왈, “짐을 내려놓으면 소가 힘들까 봐” 그런다는 거였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새삼 ‘배려’가 아쉬운 시절이다. 가진 것 없어 꾹 참으며 뼈 빠지게 일하는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앞에 나서려는 정치인 중에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