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시설 만석거·축만제 축조… 서둔동 일대는 시범 농업도시로

조선의 대표적인 수리시설 ‘만석거’

수원시가 최근 옛 농촌진흥청 부지에 들어설 ‘농업 역사·문화 체험관’ 건립사업 추진상황보고회’를 열고 사업 진행상황을 점검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전국 최초의 ‘농업 역사·문화 체험관’이 자리할 서둔동은 한국 농업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지닌 곳”이라며 “서호, 여기산 등 주변 경관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자연 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수원은 오랫동안 한국 농업과학의 메카였다. 국내 농업 발전을 위한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대가 수원에 있었다. 조선 정조때부터 농업 생산지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농업을 이끌었다.

조선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켜서 나라의 근본을 도덕성과 농업생산에 두도록 했다. 왕권강화와 함께 중농사상(重農思想)을 수용해 이용후생론과 과학기술 및 상공업의 중요성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시행하고자 했다. 특히 수원은 정조가 농업생산의 진흥을 위한 권농정치의 강화를 의도했던 곳이다.

정조는 수원의 장안문 북쪽 들판에다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대유둔(大有屯)을 조성했으며, 만안제(萬安提 : 현 안양시), 만년제(萬年提 : 현 화성시 안녕리), 그리고 축만제(祝萬提 : 현 수원시 서둔동, 일명 서호)를 축조했다. 저수지를 통해 동서남북의 들판을 수리(水利)가 가능한 옥토로 만들었다.

서둔벌은 우리나라 굴지의 시범적인 농업도시 한가운데 위치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고 유지되는 미래지향적 자급도시의 한 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조의 급서로 수원부 권농과 시범농업의 꿈은 중단되었다. 조선말인 1895년과 1899년 고종의 칙서로 실용 ‧ 근검 ‧ 노작을 지표로 하는 농업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일제 통감부는 1906년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했다. 한국정부는 일제통감부로부터 권업모범장을 이양받고 황제의 재가를 얻어 ‘권업모범장관제’를 공포하였다. 서둔벌은 국내 농업과학기술연구와 농학교육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정조의 농업입국 의지가 서린 수원의 북둔(대유둔)과 서둔(축만제둔) 중 수리조건이 좋고 풍광이 아름다운 서둔에 모범장의 위치를 선정했다. 1904년에 개통한 경부선 철도로 서둔의 교통이 편리해진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권업모범장의 시험과 연구는 한국의 전통적 관행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으로부터 직수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한국에 맞는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업모범장은 '모범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실질적으로 한국농업에 일본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농업기술로도 한국을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둔벌에 세워진 농림학교는 1899년 대한제국의 ‘상공학교’로 개설되었다가 일제의 영향으로 1907년 3월 26일에 ‘농림학교’로 개편되어 수원 서둔벌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의 고등농림학교에서 펼쳐진 서둔농학의 교육 실체는 애국운동과 독립항쟁이라는 청년학생들의 사명감과 애국심을 일깨웠다. 일제의 농업 교육이 오히려 식민지배로부터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의지를 키웠던 것이다.

청년학생들은 각종 동맹휴교・비밀결사・학생단체 조직활동이나 계몽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학문연마와 체력단련에 주력하며 심신을 수양하고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곧바로 항일운동에 동참케 하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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