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개항장에 대불호텔… 근대 숙박 문화를 열다

▲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인천 중구청 인근에 있으며 최근 건물형태가 복원됐다.
▲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인천 중구청 인근에 있으며 최근 건물형태가 복원됐다.

인천 개항 후 사람 몰려, 서울 가기전 잠시 머물 공간 필요해

각국 외교와 사교 공간… 중국집 거쳐 생활전시관으로 재탄생

인천은 대한민국의 출입구다. 대부분의 국민이나 외국인들은 인천공항을 통해서 한국을 오간다. 130년전에도 그랬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갔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 인천에서 서울까지 당일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히 묵을 곳이 필요했다. 인천에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이 들어서게 됐다. 바로 대불(大佛)호텔이다.

인천시 중구청 인근 호텔 자리에 최근 새로운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중구 생활사전시관이다. 전시관 2층 건물은 대불호텔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전시관은 제1관 대불호텔 전시관과 제2관 1960~1970년대 생활사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이 아닌 서양 문물이 들어온 관문인 인천에 있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인천에는 해외 각국의 외교사절과 여행객들이 북적였다. 인천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은 경성(서울)으로 가기 위해 12시간 동안이나 우마차를 타야 했다. 이 때문에 인천에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개항장에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절실했으며, 이 시기가 대불호텔의 황금기였다.

대불호텔은 1887년 착공해 이듬해 완공됐다.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가 운영했으며, 3층짜리 양옥 건물로 침대 객실과 다다미 객실, 식당을 갖췄다. 호리는 호텔 착공에 앞서 2~3년 전쯤부터 바로 옆 일본식 2층 목조건물(오른쪽)에서 서양인들을 상대로 숙박업소를 운영해 온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되자 호리는 바로 옆에 서양식 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대불호텔을 짓고 본격적인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됐다. 인천에서 경성까지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됐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은 곧바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숙박 여행객이 점차 줄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은 1907년께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불호텔은 중국인에게 넘어갔고 이 건물은 요리집 중화루(中華樓)로 바뀌어 한때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이후 대불호텔 건물은 1978년 철거됐고 오랫동안 공터로 남아있었다.

2011년 대불호텔 터에 상가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붉은 벽돌 구조물이 발견됐다. 인천시와 중구청은 '대불호텔 터에 대한 문화재적 관점에서의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며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문화재청은 대불호텔 터를 '원형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중구는 이 부지를 매입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중구와 땅 소유자가 매매에 합의하지 못해 수 년간 방치돼 있다가 마침내 대불호텔을 복원하게 됐다.

◆사교와 외교 공간

개항이후 인천영사관(현 인천 중구청) 옆에 있었던 대불호텔은 각국 외교와 사교의 공간이었다. 각국 유명 인사들이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머물기도 했다. 조선말 인사였던 충정공 민영환, 윤치호, 독립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안경수 등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일본영사관은 대불호텔이 누가 드나들고 누구를 만나는 지 세심히 관찰했다. 조선 관리가 대불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영국군인들이 호텔에 음식을 주문했다는 등의 내용 등을 샅샅이 파악했다.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충정공 민영환이 통역을 대동하고 이 호텔에 나타나기도 했다. 중국 상해로 가기 위해 윤치호는 이 호텔에 묵었다. 그는 이 곳에서 민영환 형제를 만나 시국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한때 인천에서 활약했던 안경수는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대불호텔에 잠시 묵는다. 그가 살던 집이 인천 중구 전동에 있기도 했다.

인천 개항장 일대에는 대불호텔 외에도 중국인 이타이(怡泰)가 운영한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Hetel de Coree)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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