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 무너져… 조공관계서 수평관계로

인천 중구청 인근의 청일조계지 계단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근대화의 길로 달려간다. 서양 배우기에 온힘을 쏟는다. 한편으로 서양에서 배운 것을 동양에 써먹으려 시도한다. 자신들이 서양에 당한 그대로 중국과 조선에 무력으로 조약을 요구한다. 1871년 청과 조약을 맺으며 과거 청에 조공을 바쳤던 상하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전환을 꾀한다.

◆청에 먼저 조약 요구

1870년 일본은 청에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청은 지금까지 조약 없이도 통상을 잘 해왔으니 예전처럼 하면 된다며 조약을 거부했다. 당시 일본과 청나라는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이홍장은 일본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장차 잠재적인 위협이 될 것을 염려해 조약을 체결하자는 입장이었다. 당초 거부 입장을 보이던 청 조정도 입장을 바꿔 조약을 맺기로 했다. 일본과 연합해 서양을 누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일본이 청과 조약을 서두른 것은 대외적으로 메이지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인받을 필요성도 작용했다. 천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면 청나라 황제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했고, 조선과도 천황의 이름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해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은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1870년 수호조약과 통상조약을 요구했다. 일본측 관리 전권대사는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를 비롯해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이었다. 일본의 요구에 청나라 조정은 찬성과 반대로 갈렸다. 반대 측은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은 결국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청나라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패권국의 자리를 상실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청나라가 약소국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은 조약을 맺지 않으면 구미 열강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명분을 들어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일본은 조약의 첫머리에 ‘대일본국 천황과 대청국 황제’를 명기함으로써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내지 통상과 영사 재판권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유리하지만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이홍장은 중국에 일본과 구미열강은 여러 면에서 다르므로 동일한 근대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예컨대 일본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구미열강은 아주 멀리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 상선이 구미 열강에는 왕래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자주 왕래한다고도 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수호통상은 구미열강과의 근대조약과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맺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청의 주도로 조약 맺어

일본과의 조약에 찬성 입장인 이홍장은 두 가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첫째는 ‘(청·일 양국이) 타국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을 당하면 서로 돕거나 혹은 중간에 개입해 주선함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한다’였다. 청·일 양국이 수호통상하는 근본 목적이 구미열강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서로 도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청일수호조약은 근대 조약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아울러 일본을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확실하게 묶어두기 위한 방편이었다.

둘째로 이홍장은 ‘양국에 속한 방토(邦土)도 서로 예로써 대하고 상호 간에 침략하지 않는다’는 요구도 강하게 주장했다. 이때 양국에 속한 방토는 단순한 영토가 아니었다. 방(邦)은 본국의 영토라는 의미였지만 토(土)는 속방의 영토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서 일본은 속방이 없었지만 청나라에는 조선·유구·월남 등 적지 않은 속방이 있었다. 따라서 이홍장의 요구는 일본이 중국 본토는 물론 조선·유구·월남 등 속방도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같았다.

양국 모두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고 상호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여 양국민 분쟁시 양국 관리의 협의 아래 재판을 하며, 관세율도 상호 협정으로 시행할 것을 규정한 대등조약이었다. 서양은 청일조약을 공수동맹으로 간주했다. 조항에는 ‘속방도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는 청이 베트남과 대만, 조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두 나라 협상 대표였던 이홍장은 당시 49세였고, 다테 무네나리는 54세였다. 비록 다테 무네나리가 나이도 많고 한학에 해박하기도 했지만 이홍장은 청나라 최고의 지식인이자 경세가였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수호통상 협상은 이홍장의 주도로 진행됐다. 한 달여의 협상을 거친 결과 1871년 7월 마침내 18조로 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와 33조로 된 ‘통상장정(通商章程)’이 조인됐다.

청일수호조규는 조공책봉 체제와 근대 조약이 교묘하게 결합한 모습을 갖게 됐다. 청일수호조규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역사 이래로 조공책봉 체제를 고수해오던 중국이 일본과 최초로 근대적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중국의 힘이 약해지고 메이지 천황의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조약 3년 후 대만 침공 놓고 청일 격돌

‘청일수호조규’를 놓고 3년후 일본이 청나라를 시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74년 일본은 대만을 침공한다. 3년전 대만에 표류됐던 오키나와 주민을 살해했다는 보복 차원이었다. 1871년 대만과 지금의 오키나와 (당시는 류큐(琉球)왕국) 선원 69명이 대만에 표류하는 일이 발생한다. 3명이 익사하고 66명이 생존했다. 대만은 54명을 살해했고 12명만이 살아남아 청나라에 구조를 요청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1874년 병력 5000명과 군함 5척을 보내 대만을 침공한다. 대만이 공격당하자 청은 곧바로 일본에 항의한다. 사절을 일본에 보내 1871년 체결된 ‘청일수호조규’ 중 ‘소속방토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들어 엄중 항의했다. 청나라 사절은 대만은 청의 소속방토이고 대만 주민은 청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며 즉각적인 철병을 요구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대만 원주민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역시 청나라의 소속방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청나라와는 화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약 청나라가 전쟁을 도발하면 교전하지 않을 수 없다”며 대책을 세운다.

청과 일본은 협상을 벌이나 일본의 강력함에 청이 뒤로 물러선다. 청은 일본이 대만에서 철수한다면 대만 침공을 문제삼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류큐왕국을 일본 영토로 인정한다는 뜻과 더불어 군사적으로 일본이 우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청나라는 매우 치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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