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우리 집 담장은 다른 집보다 벽돌 두 장 정도가 높았다. 별명이 ‘껑달이’이라고 불릴 정도로 키가 크셨던 아버지 눈높이에 맞추어 그렇게 된 것뿐이다. 대문 앞에는 아버지를 쏙 빼닮은 은행나무도 있었다. 목덜미를 한참 젖혀야 나무 위의 하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 한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까지 넓게 드리웠다.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던 동네 어르신들은 점심때가 지나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은행나무 밑 평상으로 마실 오듯 들렸다. 그때의 우리 집 앞마당은 마을 전체의 공동소유나 다름없었다. 어른들은 평상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마주 보게 놓은 긴 의자에서 온종일 담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어렸을 때는 재밌는 놀이라고 해야 은행나무를 부둥켜안고 말타기 놀이를 하거나 까치발을 들고 키재기를 하며 장난삼아 둥치를 쓰다듬었다. 그런 극성스러운 손길에 등껍질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경제가 발전되자 자연스럽게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동네의 낡은 집들은 하나둘 허물어졌다. 새집을 지으면서 큰 나무들도 거침없이 베어져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인가 우리 집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 이젠 늙어서라고 했지만, 농촌진흥청에 다니는 꽃집 사위의 말이 가장 믿을 만했다. 그는 근처의 수나무들이 다 베어져서 씨받이가 안 돼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을 의심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나는 뜨악해져서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큰 은행나무였는데 내 손이 닿았던 높이만큼의 둥치만 남기고 싹둑 베어져 있는 게 아닌가. 홧김에 아버지가 그랬다고 했다. 장기를 두다가 사달이 났다. 멱살까지 틀어잡으며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드잡이가 났단다. 둘 다 파출소로 끌려갔고, 경도 아저씨가 훈수를 둔 게 싸움의 빌미가 됐단다. 힘이 센 아버지는 싸울 거면 아무도 오지 말라면서 나무를 싹둑 베어버렸단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고 새봄이 와서 농사일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마당을 쓸고 난 후 쓰레기를 은행나무 밑동에 던졌는데, 수십 개의 연둣빛 우듬지가 땅을 밀고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은행나무는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 다시 여름이 왔다. 나뭇가지가 없어 그늘이 지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나무 밑동 곁에 놓인 평상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곤 했다. 마치 그늘이 있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장기와 바둑도 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겁도 없이 옛집을 헐고 5층짜리 원룸 건물을 올렸다가 크게 낭패를 봤다. 하필 그때 IMF가 터졌다. 젊은 직장인 특히 신혼부부들이 내 집 마련할 때까지 살도록 평수도 널찍하게 잡았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처음인지라, 주위 사람들은 시큰둥하며 시샘까지 부렸다. 하지만 그들의 시기심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18칸의 방은 준공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조리 계약이 완료되었다.

그렇게 몇 년간 잘 나가나 싶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여기저기에 너도나도 원룸을 지어댔다. 우리 집은 달랑 방 하나인데 그곳에서는 냉장고와 TV는 물론 에어컨까지 덤으로 얹어주면서 세를 놓았다. 계약 기간 2년이 만료되니 한두 집씩 빠져나갔고, 새로운 입주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국가 부도 사태인 IMF로 인해 뒤엉킨 실마리를 더는 풀 재간이 없었다. 어제 온종일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제2 시집인 ‘은행을 털다’가 나와 이런 사연도 되뇌어본다. 공사가 시작될 때 은행나무 한 가지를 아버지 산소가 있는 선산에 옮겨 심었는데 이제는 제법 큰 키의 나무로 자랐다. 이따금 내려갈 때마다 지금은 사라진 옛집의 앞마당에서처럼 아버지와 어르신들이 바둑을 두는 환상이 떠오른다. 이번 주말에는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한다. 그간 떠돌이로 10여 년을 허송했다. 지금 시작해도 절대로 늦지 않다. ‘나는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어딜 가나 살아남을 은행나무의 힘이 내게 있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