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외면한 독립 영웅들… 이들 알리는 게 내 일”

‘김경천 평전’ 표지.

이원규(71)씨는 인천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서구 서곶(현재 서구청 인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인천에 살고 있으며 ‘황해’  ‘포구의 황혼’  ‘침묵의 섬’  등 인천과 연관있는 바다와 섬, 포구, 분단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최근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이름을 남긴 김경천(1888~1942) 장군을 알리는 ‘김경천 평전’을 냈다. 그를 만나 ‘소설과 인천’에 대해 들어봤다.

-우선 김경천 장군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기병중위 신분을 과감히 버리고 탈출,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애국 청년들을 가르쳤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백마를 타고 달리며 눈부신 항쟁을 벌인 구국의 영웅입니다. 일제가 밀정 등을 동원해 그를 그토록 잡으려 했지만 핍박받는 우리 민족은 그의 신출귀몰에 환호했습니다. 그는 광복이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민족주의자였어요.”

‘김경천 평전’은 다소 감성적이긴 하지만 눈에 밟히는 자식과 아내를 두고 일본의 감시를 뚫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는 김경천의 고민과 각오로 시작된다.

-어떻게 해서 김경천 평전을 쓰게 되었나요.

“20여년전 한인들의 강제 이주사를 소설로 쓰겠다고 정부 지원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습니다. 그곳 주민 대표들이 김경천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우리 역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라며 소설 쓰기를 권유했습니다. KBS가 장군의 진면목을 알리고 정부에서 서훈이 이뤄지는 등 김 장군이 국민들 사이에 조금씩 알려졌지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해 그 동안 모은 자료와 실존인물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김원봉·김산·조봉암 평전을 냈다. 그의 소설은 유난히 분단과 좌익, 독립 등 색깔이 진하며 여운을 많이 남긴다.

“역사의 그늘에 묻혀진 위인들을 찾아내 쓰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위해 투쟁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남북서 빛을 못보는 영웅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을 햇빛에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게 내가 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고 인천 강화와 연고가 있는 독립운동가 이동휘나 김성숙, 한위건 평전을 생각 중입니다.”

-분단과 좌익, 독립에 관심이 아주 많으신데요.

“소설가 조정래씨가 대학 선배입니다. 오래 전 그가 분단 소설을 써보길 권유했습니다. 인천은 바다와 섬이 있으니 소설의 지평을 넓히는 데도 좋다는 것이었지요. 그 덕분에 해방 직전부터 한국 전쟁 전까지 인천의 상황을 그린 작품 ‘황해’가 나왔지요. 앞으로 인천 개항과 일제강점기, 광복 후 인천의 민주항쟁까지를 담은 인천의 근현대사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베트남 전쟁(당시엔 월남전쟁)에도 참전하셨다면서요.

“특전사 공수부대 하사로 군생활 중 베트남에 갔습니다. 내 주특기는 폭파였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을 여러 차례 겪었지요. 전쟁 때문에 그런지 역사와 시대극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얼마전 베트남 여행 갔을 때 위령비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1986년 발표된 소설 ‘훈장의 굴레’에는 베트남 체험담이 절반 이상 들어가 있습니다.”

-왜 소설가가 되셨는지요.

“어려서 글을 잘 짓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인천에서 열리는 백일장에서 상을 많이 받았지요. 할아버지가 부평향교 전교(향교 책임자)를 지내셨고 아버지가 인천향토사를 만드시는 등 일찍부터 책과 글을 접하게 되었어요. 인천고 다닐 때 문예부에서 활동했으며 잠시 고민이 있었지만 대학도 자연스럽게 국문과로 진학했어요. 대학교 1학년때 총장상을 받았으나 이후 여러 차례 낙방했어요.”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인천 대건고와 인항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고교 3학년 담임만 내리 7년 정도를 하니 더 이상 새로 할 게 없었다. 8~9년쯤 교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텅빈 학교 운동장을 쳐다보니 자신이 껍데기 된 느낌이었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때마침 큰 출판사로부터 3년치 교사 월급과 출장비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과감히 사표를 쓰고 전업작가로 돌아섰습니다. 러시아·만주·중국 일대를 20여차례 돌아다녔어요. 서울신문에 1년간 독립운동 현장 답사기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 고문서가 어디 있는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자료의 달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컴퓨터에는 수백여명의 독립운동가 수형기록이 빼곡이 정리되어 있다. 현재 ‘책과 인생’이라는 잡지에 못다한 독립운동가들의 뒷이야기를 연재 중이다. 70년 넘게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해맑다. 얼굴에는 항상 웃음과 순수함이 가득하다. 남에게 부탁할 때도 상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우러난다. 집으로 찾아간다고 했을 때 ‘따뜻하게 환영한다’는 문자를 바로 보냈다.

소래포구 앞에선 소설가 이원규. “인천은 내 소설의 자양분”이라고 했다

인천은 내 소설의 자양분… 사람냄새 사라져 안타까워

이원규는 선대 조상들까지 합치면 옛 부평에서 320년 거주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자신과 같은 본토 원주민은 지금 300만 인구 중 3%정도나 될까라면서 인천이 너무 대도시가 되다 보니 사람 냄새가 없어지는 게 가장 아쉽다고 했다. 그나마 서구 일대는 아직 인천 무속 등 옛것이 남아있는 지역이라며 잘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은 소래포구 역 인근 아파트에 산다. 거실에서 소래포구와 수인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들은 날로 발전하는 송도국제도시가 좋다고 하지만 자신은 사람 냄새가 나는 소래포구가 좋아 이사왔다고 했다.

그는 인천의 문화예술계 인사인 조우성(인천시립박물관장)이나 김윤식(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등과 종종 만난다. 인천에서 수시로 인천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강연한다. 자신이 오래 살았던 인천 서구 지역의 설화를 모은 ‘천마와 아기장수 외’를 펴내기도 했다. .

그는 인천이 소설의 자양분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실제로 ‘포구의 황혼’을 쓸 때는 소래포구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도 했고 친구의 배를 여러 차례 타고 인천 앞바다까지 오가며 선원들의 삶을 체험하기도 했다. 지금도 배를 태워준 친구와 오가며 만난다.

할아버지는 부평향교의 전교(향교 책임자)를 지냈고 아버지에게 유언으로 “부평사를 쓰라”고 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이훈익씨는 사비를 들여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룰 개설해 ‘인천지명고’ ‘인천지방 향토사담’ 등을 저술, 인천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부친이 눈을 감으면서 많은 자료를 서구문화원에 기부했다고 했다.

부친 이훈익씨의 생전 자료.

이원규는 분단을 진보적 시각에서 온건하게 표현하는 작가

1947년 인천 서곶(현재 서구청 인근)에서 출생했다. 서곶초와 상인천중 인천고를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무지개’,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 공모에 베트남 참전 경험을 쓴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인천과 서해를 배경으로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주로 썼으며 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9권)’를 비롯해 장편 ‘훈장과 굴레’ ‘황해’ ‘마지막 무관생도돌’과 창작집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등을 펴냈다.

독립전쟁 현장 답사기 ‘독립전쟁이 사라진다(2권)’‘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공저)’ 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등을 출간했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때 인천 대건고와 인항고에서 교사를 했다. 모교인 동국대 겸임교수로서 10여년간 소설과 논픽션을 강의했다.

'천마와 아기장수 외'를 소개 하고 있는 이원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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