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국 사회2부 부장

필자가 젊었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직업에 귀천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고 차별대우는 생각도 못 했다. 예전에 3D라고 했다.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말한다. 우리가 꺼리는 그 업종은 이미 중국 조선족은 물론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꽉 잡고 있다. 잔업, 철야, 휴일 특근을 반복하며 피와 땀을 흘렸지만, 흘린 땀방울만큼 돈으로 보상되었다. 사무직과 생산직이란 말은 있어도, 지금처럼 정규직, 비정규직, 임시직, 계약직, 촉탁직, 아르바이트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요즘에는 노동자의 계층도 다양해졌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하는 서비스업종을 선호하는 편이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고교 2학년 때, 내가 채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갑자기 맥없이 쓰러지셨다. 어머니가 묘목밭으로 품 팔러 가서 풀을 뽑아 받는 돈이 전부였던 막막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지상천국이 된 거나 다름없다. 어머닌 그 어려웠을 살림에도 필자의 도시락만큼은 최고로 좋은 반찬으로 싸주셨다. 뭐니 뭐니 해도 공부가 젤 힘든 거라면서 집안 걱정은 조금도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던 터였다. 하지만 나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병무청에 가서 공군기술병으로 자원입대해서 1,095일 간의 병역의무를 마쳤다.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일찌감치 가장이 되기로 작정했으니 말이다.

훈련 기간 이외에는 정상출근 정상퇴근의 직장과 같아서 3년간 틈틈이 취업시험 준비를 했던 터라 제대 후 일주일 만에 대기업의 공장으로 출근했다. 첫 작업은 쇳덩이를 녹여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주물 일이 맡겨졌다. 다른 직종보다 일당이 두 배 정도가 높아 힘은 들지라도 미래가 보장될 거로 생각해서 택했던 첫 직장이었다. 잔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완전히 녹초가 돼 잠들었다. 요즘 청년들 생각으로는 미련퉁이라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기에 뒤늦게나마 방송대에 입학했다. 늦은 밤에 나오는 방송강의를 듣기 위해 머리맡에서 늘 라디오를 켜놓았다. 그러나 새벽에 눈을 뜨면 강의는 이미 끝났고, 지글지글 찌개 끓는 잡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라도 공부해서 졸업 소요학점을 취득하는 데까지 무려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현장의 힘든 육체노동을 벗어날 길은 오직 한 가지, 대학 졸업장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래야 그다음을 넘겨볼 기회도 오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이 든다. 물론 세상에 노동자 아닌 사람은 없다. 머리를 쓰든 몸으로 때우건 아니면 비록 힘든 일은 아닐지라도 누구나 노동자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육체노동은 천한 거로 인식된 게 문제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힘든 육체노동을 피하려는 유일한 방편으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누구나 졸업한 대학 출신자들은 그래서 취업할 데가 없어 방황한다. 대졸 학력으로 3D 업종에 취업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지만, 국민은 그거에 별 관심조차 없다. 당장 먹고 살길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다. 하다못해 기간제 공공일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다. 한창 세상을 뒤엎어놓았던 미투도 이젠 한물갔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이런 얘기 하면 몇몇에는 미안스럽긴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감방에 들어가건 말건 남북이 어찌 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철밥통 일자리 공개채용 공고가 난 이후 ‘나도 하겠다’라면서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타나 고개 숙이는 족속들이 부쩍 많아졌다. 하지만 임명직이건 선출직이건 간에 국민의 혈세를 빨아먹는 이들만 살판났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도 그들만큼은 무사태평하니 말이다.

 

 

먹고살기 바쁜 국민들

개헌논의.남북만남

귀에 들어오지 않아

 

취업은 ‘하늘의 별’

철밥통들만 살맛나

국민들 맘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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