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初水落照朝暉 (정초수락조조휘)

 

擲柶加觴遇好機 (척사가상우호기)

 

士訪淸溪爭馬板 (사방청계쟁마판)

 

僧留寶刹掩柴扉 (승류보찰엄시비)

 

沛顚五獸先頭易 (패전오수선두역)

 

出入多途後尾歸 (출입다도후미귀)

 

勝負難期元此戱 (승부난기원차희)

 

綿綿槿域懇望祈 (면면근역간망기)

 

 

 

정초의 수락산에 아침 해 진동하니

 

윷놀이에 술을 더하니 호기를 만났구나.

 

선비들은 계곡 찾아 말판을 다투고

 

스님은 절에 머물러도 사립문이 닫혀있네.

 

다섯 짐승 넘어지고 자빠져 선두가 바뀌고

 

많은 길 드나드니 후미로 처졌다네.

 

승부를 기약하기 어려운 이 놀이 으뜸이니

 

우리나라에 면면히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네.

* 위 시는 예년에 린사한시학회 수락산 이회에서 지은 시이다.

 

우리나라의 옛 사람들은 설을 앞뒤로 하여 겨울 내내 윷놀이를 즐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어 ‘국민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윷놀이는 어디서 유래됐고 윷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윷놀이는 한자로 척사(擲柶) 또는 사희(柶戱)라 한다. 또 윷을 한자로는 나무 네 조각이란 뜻을 따서 사(柶)로 적었다. 하지만 윷놀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고유의 놀이다. 중국에도 저포(樗蒲), 격양희(擊壤戱)가 있고 만주와 몽골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으나 그 방식도 다르고 널리 유행하지도 않았다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윷놀이가 시작되었을까?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고려의 유속으로 본다”고 했으나 최남선은 그 기원을 신라시대 이전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신채호는 그 기원을 고대 부여에 두면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부여의 지배체제는 제가(諸加)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곧 각기 말, 소, 돼지, 개를 상징으로 하는 집단이 각기 한 구역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들 제가는 각기 사방을 경계 지은 사출도(四出道)를 맡았다. 사출도는 전시체제에서 군사조직의 출진도(出陣圖) 모형이라고 한다.

윷은 나무 네 쪽으로 만든다. 앞으로 거쳐야 할 밭은 29개이다. 나무쪽을 던져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숫자에 따라 한 발을 가기도 하고 다섯 발을 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정해진 코스에 따라 먼저 나오면 이긴다.

이 자리에서 굳이 놀이방식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윷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명이 필요하다. 윷판은 둥근 원 안에 십자를 그리고 밭 29개를 그려놓았다.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배치한 28개마다 우리말의 이름을 붙였다. 곧 입구를 도, 길이 갈라지는 곳을 모, 뒷모, 찌모라 부르며 출구를 참먹이라 했다. 윷판을 보면 방이 가장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아 중심축을 나타낸다.

윷놀이가 한 때 수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일제시기 ‘조선의 명절’과 민족놀이를 억제하는 과정에서 윷놀이도 압제를 받았다. 하지만 해방 뒤 다시 살아나 농촌 마을과 도시를 기리지 않고 곳곳에서 마을 대항으로 척사대회를 벌였다. 또 두 사람을 단위로 놀이를 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패를 갈라 놀이를 할 수도 있어서 그 겨루기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윷놀이는 민중의 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윷놀이는 단순한 승부를 겨루는 유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나 신수를 점치는 예언적 의미로 변용되기도 했다. 그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먼저 농사와 관련지어 치는 점의 방법을 알아보자. 한 동네라도 윗마을 농민은 화전농이요, 아랫마을 농민은 수전농(水田農)일 경우가 많다. 화전농과 수전농으로 패를 갈라 윷놀이를 벌인다. 이를 각기 산농(山農) 수향(水鄕)이라 부른다.

산농이 이길 경우, 그해에 홍수가 져서 수향의 수확이 적을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산농의 농사짓기가 유리할 것으로 여겼다. 산농들은 이겼다고 하여 술과 음식을 내서 즐긴다. 돌팔매질하는 따위로 벌이는 동전(洞戰)과는 달리 친목을 도모하는 터가 되었다.

서예가 서명택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