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초 동맹휴업, 인천 독립 운동 불붙이다
인천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업에서 출발했다. 당시 학생들은 만 5세∼25세로 나이와 학력 차이가 심해 1,2,3학년 6개 학급으로 나눠 오전과 오후 2부제 수업을 했다. 휴업에 들어간 공립보통학교 3, 4학년생들은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과 합류해 만세 삼창을 외치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노동자 행동을 촉구하는 격문과 독립선언서도 인천 전역에 뿌렸다.
◆ 창영초서 3.1운동 시작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쯤 인천 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교) 3학년생 김명진·이만용·박철준은 우각동(현 금창동)에 있는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침입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임시 설치된 전화선을 끊고, 수화기를 모두 부쉈다. 교직원들이 이틀전인 6일 시작된 학생들의 동맹휴업 사실을 경찰에 보고하는 등 독립 운동을 방해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수화기 횡령과 가택 침입 및 전신법 위반 등으로 붙잡혀 징역형을 받은 김명신 학생은 당시 경찰에 '내나라 독립을 위해 한 점도 부끄럽지 않다'고 외친 것으로 전해진다.
만세 시위 행렬은 청년과 학생들이 주동이 됐다. 9일 오후 8시 30분께 50여 명이 인천시내 동쪽 끝 도로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1명이 체포되고 강제 해산됐다. 10일에도 시민과 학생 200여명이 모여 도심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다 8명이 붙잡혔다. 시내 상점들은 문을 닫아 이 운동에 동참했으며, 조선독립신문도 곳곳에 나돌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강덕우 박사는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인천 부평과 월미도, 덕적도, 강화군 등 시내 전역으로 번진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된 인천의 3.1 만세운동은 부평의 인천 최대 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3월 24일 부평시장에서는 부평면사무실이 파괴되고, 심한 몸싸움을 벌이던 경찰이 처음으로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날 오후 2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청년을 데려오기 위해 몸싸움을 하던 이은선 열사가 경찰 칼에 찔려 순국했다.
◆ 황어장터 만세운동
잉어의 산지라 기명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황어장터는 5일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뿐만 아니라 1일 200여 두의 거래가 이루어진 소시장으로 이름이 난 곳이다. 1910년대에는 더욱 확장되어 1일 소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렀으며 이용 주민이 1000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켜 인천에서 가장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되었으며 강서지방 최초의 만세 운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 운동은 인천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 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심혁성의 탈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격분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협의가 있다고 보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만세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 운동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