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체제·신분제 철폐 등 대개혁… 토지 제도 개혁도

이토 1870년 미국에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된다. 사무라이 제도가 철폐되고 신분이 평등해지며 징병령이 행해진다. 철도와 우편 등 산업 정책이 펼쳐지고 토지 제도가 개혁되고 근대식 교육 제도가 확립된다. 개항 후 불과 20여년 새 쉴새없이 근대화를 향해 달려나간다.

◆천황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1867년 막부의 권력이 천황에게로 옮겨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진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단행되고 신정부는 각 번의 영주가 갖고 있던 영지 지배권(版圖)과 백성 지배권(戶籍)을 천황에게 바치도록 했다. 대신 영주는 그대로 지사로 임명되어 번을 다스리게 했다. 영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봉환했다는 의미로 판적봉환(版籍奉還)이라 한다. 번의 영주가 지사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봉건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후 1871년 지사들을 면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옛 번을 폐지하고 현을 새로 설치했다. 현에는 중앙 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를 파견했다. 두 번째 유신이라 불리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성공으로 봉건적인 분할 행정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사쓰마번이나 조슈번이었던 과거 영주 체제는 사라지고 3부 43현으로 중앙중심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신분제 쳘폐·징병제 실시

1870년 봉건적 신분 질서 폐지로 농민과 평민들에게도 무사들만 썼던 성을 허용했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에도시대 농 · 공 · 상을 평민으로 하면서 에타(穢多), 히닌(非人) 등 천민을 평민으로 해방했다. 이른바 4민 평등이 이루어졌다. 폐도령(廢刀令)이 내려져 사무라이가 칼을 차는 것이 금지됨으로써 평민과 구별짓는 사무라이의 특권은 모두 사라졌다. 사무라이를 상징했던 일본식 상투 촘마게도 사라진다.

1876년 사무라이에 지급되던 가록(家祿)을 정지하고 퇴직금 형식으로 일시금을 지불한다. 이를 '질록 처분'이라 한다. 이를테면 퇴직금인 셈이다. 그러나 퇴직금으로 사업을 해 성공하는 자가 드물듯이, 사무라이들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거의 실패했다.

일본 지도자들이 서양을 시찰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은 군사력 강화였다. 1873년 메이지 정부는 징병령을 발표하여, 20세 이상 모든 남자는 3년간 현역에 복무하고 그 후 4년간은 보충역에 남는 내용의 제도를 마련했다. 관립 학교 학생이나 졸업생, 관리, 호주, 상속자 등은 면제되었으나, 원칙적으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시행했다. 이전 군사적 임무는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만이 갖고 있던 특권이었다. 사무라이는 가난하고 어려워도 이 특권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징병령은 이런 특권 계층으로서 사무라이의 존재 이유를 무시했기에 사무라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하기 기병대

◆토지제도 개혁, 교육제도 확립

1873년 토지 제도를 개혁해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지가를 확정하여 지가의 3%에 해당하는 지세를 내도록 했다. 농민은 지세 이외에도 지가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메이지 정부는 조세 수입의 안정을 도모하고 근대적 재정 제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1872년 전국에 소학 6년, 중학 6년, 대학 4년의 학제로 근대식 학교를 설립했다. 소학교는 의무 교육으로 정했다. 1872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학문의 권장’ 초편이 발간된다. 그는 ‘하늘은 사람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고 유명한 인간평등선언을 했다. 국민에게 왜 공부해야 하는 가를 설파했다. 340만부가 발행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1872년 태양력을 실시한다. 1873년 메이지 천황이 단발한다.

◆철도 금융 등 산업 정책 추진

하기역 앞과 철도왕

일본은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하여 산업 분야의 다양한 개혁을 시행했다. 1870년에 설립된 공부성(工部省)은 철도 부설, 광산 개발, 군수공장 경영과 같은 사업을 통해 부국강병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근대적 은행 제도, 통화 제도를 이 시기에 도입했으며, 도쿄~요코하마, 오사카~고베, 오사카~교토 사이의 철도를 개설했다. 1872년에 도쿄~요코하마 구간에 이어서 오사카~고베, 오사카~교토 구간 철도가 개설되어 개항장과 대도시를 연결하였다. 전선도 1869년에 도쿄·요코하마 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5년 후에는 나가사키와 홋카이도에까지 연결되고, 나가사키와 중국의 상하이 간의 해저 케이블도 설치되었다. 통신에서는 1871년 관영의 우편제도가 시작되었다. 군사 공업에 힘을 기울였고, 1873년부터는 내무성이 중심이 되어 방적 · 해운 · 목축 분야에서 민간의 경공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의학도 눈부시게 발전한다. 18세기 이미 해부학 서적을 출간한 일본은 1868년 일본 의학이 서양의학에 준거할 것임을 결정한 포고를 발표했다. 1870년에는 서양의학 중에서도 독일의학의 채용을 공식적으로 결정한다. 동경대 의학부는 독일 의학을 수용 교육하고 1890년대 동경대 의학부 교수진이 모두 일본인 차지가 된다.

외국 시찰과 외교도 강화한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참가한다. 1871년 청나라와 수호조규를 맺는다. 1874년에는 대만 정벌에 나서고 1875년 조선 강화도 앞바다에서 운요오호 사건 일으킨다. 사쓰마번의 무라다는 프랑스와 프러시아로 가서 300정의 소총을 갖고 귀국한다. 분해와 개량을 거듭해 1882년 무라다 소총을 개발해내고 1890년 연발총으로 만들어 일본 육군의 주력 무기가 된다. 무라다 연발 소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의 1등 공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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